제7회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자 발표

제7회 <시인수첩 신인상>의 당선자는 고은진주‧이원석 시인이다. 시단의 등용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시인수첩 신인상>은 개성 있고 뚝심 있게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하는 시인을 배출하여 한국 시문학의 지평을 공고히 다지고 있다. 올해에는 김병호 주간, 전동균 시인, 문학평론가 유성호 교수께서 심사위원으로 수고해 주셨다.

 

심사총평 발췌

심사위원들은 시의 전통적 미학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수사학적 요소를 확장하는 새로운 모험을 응원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언어와 사유의 균형성, 개성적 시적 감각과 시적 육화 능력 등을 눈여겨보기로 하였다. 심사위원들은 완결성과 안정감 그리고 개성적 상상력이 대척점에 있는 가치가 아니라 생각하였으며 언어의 긴장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체험의 강렬함을 포착하고 자신의 미학적 지향점을 선명하게 제시한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짧지만 치열한 의견을 나누었고 별다른 이견 없이 두 명의 최종 당선자를 추천할 수 있었다.


7회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 고은진주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외 4편

고은진주. 1967년 전남 무안 출생. melod@naver.com

막 피기 시작한 장미가 문을 열어 주었네. 탁상용으로 주조된 여름이었네. 어떻게 야만과 측은을 딱 떼어 놓을 수 있는지 장미 넝쿨 속에서 나는 울었네.

여름의 날짜가 하나씩 또는 무더기로 관에 넣어지고 있을 때, 우리는 동그라미를 치고 날짜가 이탈하지 않도록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네. 예고도 없이 아무 데나 던져지고 파헤쳐져 소품에 불과한 숫자가 쓰러지고 있었네.

1에서부터 10까지 똑같은 검지손가락으로 똑같은 사투리를 섞어 똑같은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가지 치는 중에도, 질서가 없는 듯 질서정연하게 나열되어 있는 달력은 제 입으로 여름을 말한 적이 없었네. 넝쿨로 엉키고 닫힌 골목, 문 여럿이 쾅쾅 울었네.

휴교령이 내려진 책상마다 먼지의 꽃다발이 놓여졌네. 달력의 숫자가 팔목에 박히고 루트의 공식 안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꽃봉오리, 여름의 냄새를 맡은 파리 떼가 몰려들었네. 파리약 같은 장미 꽃송이가 두개골을 비집고 들어왔네. 훌쩍훌쩍 쏟아져 나가는 하루 이틀 열흘, 넝쿨이 잘린 채 기념식장으로 가는 숫자를 기록할 수가 없었네.

밟히고 긁힌 자국은 모두 어둠의 달력에 친친 감아 놓았네. 대체 휴일을 사용하지 말라는 법이 만들어졌으나 검은 장미가 피고 달력의 빨간 숫자가 모두 빠진, 여름휴가를 반납하지 않겠네.

쓰레기 치우듯 숫자를 몽땅 쓸어 낼 수 없어서 날짜 몇 개를 상실하겠다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네. 발밑으로 떨어진 매운 연기를 애도하다 달력 한 귀퉁이에 막 지기 시작한 구호 하나를 메모하네.

* 메리 올리버.

고은진주 집중심사평 발췌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등을 응모한 고은진주 씨의 시편들은 무엇보다 잘 읽힌다. 시를 끌고 가는 힘이 있고, 또 시의 육체를 이루는 표현의 매혹도 지니고 있다. 일견 평이하고 범상해 보이는 삶의 이면에 숨은 것들을 포착하는 눈길은 깊고, 종이에 물이 스미듯 공감을 얻는 표현과 진술은 대상을 자기 것으로 육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의 발견이 고은진주 씨의 시적 토대와 특성을 이루고 있는데, 「손목」 「이미테이션가수」 「칩, 칩」 같은 시편에서 보여 주듯 자연스러운 발화 속에 삶의 연민과 곡진함이 스며 있다. 사유의 폭 또한 만만치 않다.


7회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 이원석

스노우볼 외 4편

1990년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및 같은 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 hyeon.e@daum.net

너에게 커다란 수박을 건네받았다 그것은 하얗고 줄무늬가 무성한 달이다 두려움처럼 명멸하는 달을 너에게 도로 건네준다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달이 내게 굴러온다 나는 이걸 안아도 보고 굴려도 보건만 차마 먹어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점점 여물고 울창해지는 달 너희 집 앞까지 굴려 가는 이것이 내가 건네는 마지막 겸양이리라 과연 며칠 만에 돌아온 달은 내 방을 한가득 차지하고 밀림 같은 배를 드러내고 있다 칼집을 내듯 들창을 여니 물기 가득한 달의 속살이 한기에 떨고 달빛은 웅덩이처럼 고인다 피 흘리는 너의 호의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커튼을 드리운다 웅얼거리는 달의 뱃속에 검은 초목들이 흔들리고 이따금 손발을 높이 치켜세운다 너를 행복한 불면으로 빠뜨리는 울림, 그것을 차마 너에게 돌려 줄 겨를이 없도록 부풀어 오르는 구석으로 나는 떠내려간다

 

이원석 집중심사평 발췌

이원석 씨의 작품들은 감각의 구체와 진정성 있는 자기 개진의 열도를 드러내 보여 주었다. 당선작인 「스노우볼」은, ‘달’의 생성과 소멸의 이미지를 잘 살려 ‘나’와 ‘너’가 호혜적으로 주고받는 겸양과 호의와 행복한 울림을 잘 형상화했다. 그 밖에도 이 당선인에게는 극적 구성을 취한 작품이나 상상력의 생기 있는 출렁임을 보여 준 실험적 작품이 많았음을 부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