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핸드 발리

김병호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7년 6월 19일 | ISBN 9788983926555

사양 124x198 · 144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3 | 분야 시집

책소개

‘직유의 시인’이며 ‘사랑의 시인’,

시를 통해 현실을 경험하게 하는 직유의 힘을 펼쳐 보이다

그동안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을 반영하고 정신적 가치를 담을 수 있는 시 전문지가 되고자 노력해 온 계간 『시인수첩』에서 2017년 6월 <시인수첩 시인선>을 새롭게 선보인다. ‘한국 시문학의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하고, 고유한 개성과 다양성을 펼칠 수 있는 장(場)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기존의 문예지 카르텔에서 배제당한 시인들을 함께 보듬고 그들이 비평가가 아닌 독자들에 의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힘과 열정을 보태고’자 했던 계간 《시인수첩》 의 창간 정신을 되돌아보고 시인선을 함께할 시인들을 모시게 되었다. 고운기, 유종인, 김병호, 임동확, 고재종, 황수아, 이지호 등 세대와 계열을 초월한 시인들을 통해 우리 시단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시인수첩』에서 세 번째로 선보일 시집은 김병호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백핸드 발리』이다. 이런 표현이 어울리지 모르겠지만, 그는 묻혀 있는 시인이다. 또래의 시인들이 ‘미래파’의 세례 속에서 주목을 받고, 모더니즘의 확장된 경계에서 시작업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세류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만의 시세계를 개척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고답적 전통주의 서정에 얽매여 있는 것도 아니다. 행간에서는 1980년대 ‘시운동’ 동인들이 보여주었던 밀도와 긴장의 정신이 보이기도 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자아에 대한 성찰과 상상력으로 내면의 풍경을 베껴내는 품이 예사롭지 않다.

김병호 시인은 2013년 두 번째 시집 『밤새 이상을 읽다』로 “한결 같은 인간 존재 형식의 보편성을 수습해 낼 뿐만 아니라 일정하게 서사적 계기에 대한 관심을 통해 우리 시대의 서정 원리를 심화하고 있다”는 평을 받으며 제8회 윤동주 문학대상에서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밤새 이상을 읽다』에서 시인은 흔히 ‘은유’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의 수사법으로 평가받던 ‘직유’와 서정이 어디서 어떻게 만나야 신선한 시적 효과를 자아낼 수 있는지 정확히 구사함으로써 ‘직유의 시인’으로 거듭났다. 시인이 밝힌 대로, 시인의 시편에서 직유는 가장 친절하면서도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고급스러운 수사법으로 쓰였다. 그의 시가 정치하게 서정적이며, 내적 구조는 농밀하고 외적 모양새는 아름답고 또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김병호 시인만의 ‘직유’ 때문이다.

사람 사는 일은, 굵은 꽃송이를 매단 가지의 피곤

세 번째 시집인 『백핸드 발리』 는 한층 깊어진 시선으로 세상과 삶을 향한 따뜻함을 전한다. 그의 시선은 세상의 그늘, 굵고 화려한 꽃송이를 매단 가느다란 가지가 제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휘어져버린 ‘꽃나무의 피곤’과 같은 곳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그가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풍경이기도 하다.

표제시 「백핸드 발리」에서 화자는 ‘커브’를 통해 “당신 없이도 고독을 매수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백핸드 발리’를 통해 “명랑한 이별을 기억”하는 자세를 익힌다. 하지만 “제 말을 수놓는 여자” 앞에서 ‘하늘만 바라보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세상의 이별”은 “그만/시시해지고 말았다”(「플랫폼」). 아찔한 사랑의 방식과 막다른 이별의 자세를 “당신이라면 알 수 있을까” 싶게 이별은 “참 다른 일”(「참 다른 일」)이다. 이별은 “나의 일이 아닌 듯싶기도”(「눈 녹는 밤에」) 하고, “내 것도 아니고 당신 것도 아닌”(「첫눈」) 것 같기도 하다.

소식이라도 한번 주지 그랬나요

하늘에도 커브(curve)가 있어 별자리나 구름이 급히 기우는 자리가 있습니다

당신이 봄을 앓고 망명을 오래 생각하는 동안 오후는 다만, 다정한 거짓말에 몰두하는 자세입니다

섭섭하지 않은 궁리와 아무렇지도 않은 수작으로 마음속에 마음을 잠급니다

이제, 당신 없이도 고독을 매수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짧은 치마의 백핸드 발리처럼 훌쩍, 넘어오는 명랑한 이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덜거덕거리는 울음을 들여다보면 그제야 꽃이 지는 기적이 있습니다

구름과 허공 사이에 놓인 당신을 넘어 질주하는 허기는 까맣고 딱딱하게 오후를 태웁니다

당신은 우주에 떠 있는 커브 안으로 사라집니다

– 「커브(Curve)」 전문

시인의 시는 낯선 감각의 새로움을 쫓기보다는 일상을 둘러본다. 일상에 갇혀 전전긍긍하며 하루를 살아 내지만 형상이나 기미 없이, 얼룩처럼 흔적으로만 남은 것들에 자꾸 마음이 기운다. 마흔 넘은 남자가 딸아이와 함께 봉숭아물을 들이다 아이 엄마에게 핀잔을 받는다. “나비처럼 밤새 가벼워지는” 마흔이라고 “꽃이 되고픈 마음”이 없을까(「꽃의 자리」). 마흔 넘은 남자는 “자면서도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딸애의 침대 끝에 걸터앉아 “서로의 봄이 달라도 삶은 다정해”지기를 바란다(「봄의 미로」).

삶은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삶 속의 건강하고 보편적인 진실을 포착하려는 시인은 노력은 시집 전체에서 엿볼 수 있다. ‘커브’와 ‘백핸드 발리’가 더욱 휘어지고 강직해져 ‘직구’와 ‘포핸드 발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어쩌면 ‘정상’이 아니라 ‘미달’이나 ‘과잉’이고 더러 ‘불우’해 보일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봄 꽃길을 걷던 장님 둘, 여자 위로 동백 한 송이가 떨어지자 “콩닥대는 심장 소리를/얼른 남자가 안는다(「아무의 동백」). “아침부터 죽음을 제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골목길을 막은 영구차를 앞질러 가지 못하고 슬금슬금 “참, 순하게 따라간다”(「누가 부르는 것처럼」). 아들을 돌보는 일흔 노인(「팔월」)과 엄마를 묻고 오는 어린아이(「오지 않는 술래처럼」)도 지나치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게, 모르게” 아버지 집엘 들러 붉은 기운의 식기를 닦고 온다(「구름의 약점」). “지금 엄마 일하고 있으니까 전화하지 마”라고 말하는 요구르트 아줌마의 전화 통화를 엿들으며 차마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가만,」). 무릎보다 낮은 반지하 쪽창에 놓인 보행기 신발과 앞코 해진 운동화를 보았다면 뽀드득 햇살 미끄러지듯 지나친다(「봄도 없이 삼월」).

‘백핸드’는 ‘포핸드’에 비해, ‘커브’는 ‘직구’에 비해 기술적 훈련이 더욱 필요하고, 상대방의 심리나 상태에 훨씬 자세해야만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사랑과 이별, 고독과 견딤의 정서나 감각 못지않게 그것들을 대하고 그것들과 이야기하는 자세와 태도, 방법이 『백핸드 발리』에서 유난히 자주 언급되는 까닭도, 그 효과를 감안한 선택일 것이다.

 – 최현식 작품 해설, 「커브(curve)식 고독 혹은 사랑」에서

‘아무’라는 현대인의 새로운 정체성

시집의 2부에는 ‘아무의-’라는 관형사를 변주한 제목의 연작시 10편이 자리해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추적하면서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를 무마하고 부정하는 욕망을 여과 없이 보여 주는 ‘아무’라는 단어는 현대인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시인의 ‘커브’와 ‘백핸드’는 누군가로 인한 고독과 그리움이 마침내 온유한 사랑으로 형상화되어 스스로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인간으로 치면 완미하고 성숙한 중년의 모습이 아닐까. “아무도 모르게, 모르게” 시인은 ‘아무’를 새기고자 한다.

나무로, 새로, 왕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바람이나 강물로도 살아갈 수 있을까

성에 낀 창문과 말갛게 씻긴 지붕과 우듬지의 빈 새집과 서쪽 지평선 위의 성좌가/반짝인다, 아주 잠깐

너는 내 옆에서 몸을 구부린 채 잠들어 있다/네게 이 별의 이름을 주지 않았을 때/네가 나의 운명에 속하지 않았을 때/너는 무엇이었을까

궁리를 하는 사이,/새벽이 다시 어두워진다

네가 뒤척일 때마다 바람과 얼음과 울음은/나의 몫이었으면/소금돌을 핥는 꿈에 시달리다 맞은 새벽도/다만 내 것이었으면

창밖으론 서리가 붐비고/긴 유랑에서 돌아와 앓는/몸 밖으로 잠깐씩 달이 자란다

아직 내게로 오지 못한 것들이 남았을까

순한 짐승의 뼈로 만든 피리/같은 울음이 밤을 흔든다/눈만 흰 새의 울음이다

 – 「아무의 잠깐」 전문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고, 지금은 운좋게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는 무난한 이력의 시인이지만, 불혹을 넘긴 나이이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여전히 걷잡을 수 없는 질풍노도의 뜨거움이 감추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시를 쓰거나 읽는 까닭은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낯선 풍경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기억과 상상을 정돈하고 갱신하는 과정이 곧 공감이다.”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난 시인의 이야기가 『백핸드 발리』에 실린 54편의 시에 온전히 담겨 있다. “다가서되 방해 말고 가만히 함께 들어보며 같이 울음 우는 것이 우리들의 마땅한 자세일 것”이라는 작품 해설자의 말처럼 그의 시를 “내 것도 아니고 당신 것도 아닌”, 하지만 우리의 것으로 진정한 마음으로 공감하며 살다가 종종 끄집어내 보기만 하면 된다.

새 학기가 되면 어머니는 때 지난 달력으로 책가위를 해주셨다. 하얗고 빳빳한 책가위 위에 도덕, 국어, 산수를 적으시고 마지막에 김병호라는 이름을 정성 들여 반듯하게 써 주셨다.

시를 쓰는 일이,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다만 흉내 내어 보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스쳐 갔다. – 시인의 말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첫눈
눈 녹는 밤에
구름과 휘파람의 정오 그리고 당신
슬래브 지붕 위의 구름
커브(Curve)
숨을 곳도 없이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은
꽃인지 눈인지
참 다른 일
플랫폼
당신의 11월

2부
아무의 모과
아무의 식당
아무의 노래
아무의 잠깐
아무의 시간
아무의 폭설
아무의 동백
아무의 집
아무의 나무
아무의 노래방

3부
지금쯤
여름의 끝
소문
입술 닿듯 꽃 피듯
장미 없는 꽃집
모과
백야
저기요
자전거 보관대
파도의 사업
애플피킹(Apple picking)
그늘의 일

4부
잘 모르는 사람
오지 않는 술래처럼
봄의 미로
어제부터 첫눈
여진(餘震)
다가오는 것들
봄도 없이 삼월
동백
투명해지는 밤
팔월

5부
봄의 먼 곳
생일 아침
이월
누가 부르는 것처럼
몬순(monsoon)
어쩌면 그런 일이
가만,
자정의 알리바이
꽃의 자리
구름의 약점
배웅

해설 | 최현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커브(Curve)식 고독 혹은 사랑

작가

김병호 지음

1971년에 광주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 때」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가 있으며,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협성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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