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

임동확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7년 7월 31일 | ISBN 9788983926623

사양 124x198 · 134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4 | 분야 시집

책소개

『매장시편』이후 30년

다시금 시인을 간절히 부르는 이는 누구인가?

그동안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을 반영하고 정신적 가치를 담을 수 있는 시 전문지가 되고자 노력해 온 계간 『시인수첩』에서 2017년 6월 「시인수첩 시인선」을 새롭게 선보였다. 네 번째로 선보일 시집의 주인공은 임동확 시인이다.

임동확은 등단의 일반적 절차인,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 당선의 통과의례 대신 시집 『매장시편』을 상재하면서 당당하게 시단에 입성한 시인이다. 그만큼 임동확 시인과  『매장시편』은 우리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데, 이는 광주 항쟁의 비극성을 신화적 상상력과 교차시키면서 준열한 어조로 노래했다는 시사적 가치 때문이다. 그는 등단 이후 줄곧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관통해 온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에 기대어 죽음과 고통의 서사화에 주력했고, 자기 고백과 자기 성찰의 힘을 통해 시적 설득력을 확보하면서도, 스스로 오월 광주의 시인이라는 멍에를 짊어졌다. 그래서 오월 광주와 임동확 시인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하지만 임동확 시인은 광주 문제에만 매몰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내적으로 점검하고 직시하고 성찰하면서 시작업을 진행해 왔다.

『매장시편』 이후 30년이 지나 내놓은 아홉 번째 시집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에는 51편의 시가 담겨 있다. 임동확은 1980년 오월의 대환란을 묵시록적으로 기록하여 동시대인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함께 부채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시인은 첫 번째 시집 『매장시편』에서 망자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고 있는 삶의 조건들을 직시하고, 망자의 풍경을 기억의 역사 속에 존속시켰다.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을 간절히 부르는 것은 바로 벌거벗은 채 수장당한 이들의 맨몸이다. 그 부름은 어떤 도덕적 정언 명령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월의 기억을 인출하는 ‘풀려 버린 동공’의 물성으로 다가온다.

1980년대의  『매장시편』이 문학이 스스로 부과했던 역사적 책무와 자기 순결적 환멸이었다면, 2010년대의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는 이러한 역사적 연속의 맥락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의 새로운 변화 조짐과 징후를 예감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역사와 사회에 대한 자조와 냉소를 넘어 현실과 새롭게 맞서고 있다. 2010년대에 새롭게 전개된 사회적 지형과 상상력, 서정과 감각의 새로움은 변화된 환경 속에서 오월의 시인이 대처하는 자세와 방식을 여실하게 보여 준다. 즉 사회역사적 상황에 대한 보편적 의지의 모색과 더불어 개인적 실존의 탐색에 전념하고, 여전히 사회역사적 원초적 폭력에 맞서는 자아의 각성과 정신적 성숙을 이뤄 내는 치열함을 보여 준다.

시인에게 오월의 광주란 공간은 ‘지금 여기’를 감각하게 하는 물리적인 직접성을 가진 장소이면서 현재의 시인을 강하게 점유하는 ‘입각점(standpoint)’이다. 동시에 시인에게 유의미한 생의 단서들을 결합하면서 무한한 시적 계기들을 불러 모으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의 첫 시집에서부터 여덟 번째로 이어지는 시집 속에서 그러한 ‘오월’의 길은 다양한 형식의 시로 변주되면서 시적인 것들의 대로(大路)를 개시해 왔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는 오월의 광주라는 풍경이 “발생적 동일성(generic identity)”을 가진 사월 바다의 풍경과 ‘합생(合生, concrescence)’하면서, 어떻게 광장의 풍경과 사랑의 길을 생성시켜 나갈 것인지가 예시되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네가 깊고 푸른 심연의 난간에 그나마 성한 영혼의 한 발을 걸친 채 그믐달처럼 매달려 있을 때

내가 사랑한 건 결국 너의 전부가 아닌, 행여 저조차 끝없이 못 믿어 온 한낱 난파선 같은 나의 의지

기껏해야 벌써 싸늘해진 기억의 선체를 인양(引揚)하는 일만이 오롯이 너의 몫으로 남아 있을 때

내가 가진 것이라곤 널 최후의 순간까지 지탱해 줬을 법한 수평선마저 탕진해 버린 시간의 잔해들

 

그만 네가 신촌 사거리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연신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통곡하고 있었을 때

내가 확신하는 것이라곤 반향 없는 메아리처럼 사라진 너의 뒷등을 오롯이 기억하며 겨우 여기 살아 노래하며 기도하고 있을 뿐

정작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간절하게 부르며 거대한 수압 같은 고독과 마주하고 있었을 때

 –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 전문

오월의 광주에서 ‘매장’된 벌거벗은 몸들은 사월의 바다에 ‘수장’된 벌거벗은 몸들을 연상시키며, 벌거벗은 풍경들의 연속체가 어떻게 죽음을 거쳐 생의 진실을 의미화할 수 있는지 다시 적극적으로 묻고 있다. 시인은 벌거벗은 맨몸들을 직시할 수 없는 어두운 시대에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허위의 언어를 이겨 내고 무위의 맨몸들을 찾아 나가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이는 오월의 광주를 거쳐 사월의 바다로, 벌거벗은 것들의 광장을 거쳐 ‘너’의 맨 얼굴로 향하는 사랑의 길을 밝혀 나가는 과정이다. 길눈을 밝히는 길이다.

이 시집은 연속되는 재난의 어두운 풍경과 눈멀기 쉬운 언어적 환경을 이겨 내며 어떻게 시가 벌거벗은 진실로 향할 수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묻고 있다. 이 시집에서 온전히 보지 못하는 것, 눈먼 것들의 이미지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시인은 인간 언어의 협소한 시계(視界)를 넘어서서 어떻게 맨몸의 구체적 시계(詩界)를 열어 갈 수 있겠는지를 고민하면서, 눈먼 자들의 풍경을 장악하고 있는 그 모든 ‘이름’과 싸워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삶의 존재의 충만성이 하나의 이름으로 환원되어 존재의 특수한 세부를 살해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이름보다는 이름 너머의 풍경들에 관심을 갖는다.

시인은 시각의 한계와 사회적 가면의 시계 속에서 눈멀기를 거부하고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스스로 눈을 찔러 “생짜”의 진실을 밝히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 같다. ‘보는 눈’이 아니라 ‘듣는 귀’를 통해 다시 세상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즉 외부의 풍경을 시각적으로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주변적 목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시인은 자기 내부의 풍경의 길을 재구성하고 있는 듯하다.

언제부턴가 가속도 붙은

세월의 등짝이나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익숙해진 내가 여전히 좋아하는 건

결국 훈계이거나 계몽인 도덕률보다

천장의 파리똥처럼 주석과 각주만

날로 늘어가는 형이상학보다

제가 키운 토마토 주스에 꿀 한 숟갈을 넣는 거,

사정없이 쏘아대는 물 대포에 픽픽 쓰러진

가슴 맨 밑바닥의 자존심에도

돌고래처럼 꼬리지느러미를 툭툭 쳐 주는 일

고만고만한 꿈꾸기와 해몽의 나날 속에서

내가 이리 애타게 찾아 헤매는 건

어쩌면 숙취한 아침 머리맡에 놓여 있는

맹물 한 잔 같은 확실하고 단순한 진실,

아니, 내가 그토록 원하고 또 원하는 건

제발 오늘만은 해가 뜨지 않길 바라며

늦잠의 이불 속에서 꾸물대거나

내가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하루 종일 봄날의 종달새처럼 떠들어대는 거.

– 「무제」 전문

시인이 원하는 것은 거시적 담론의 정치사회적 변혁이 아니라, 일상을 새삼스럽게 누리면서 “숙취한 아침 머리맡에 놓여 있는/맹물 한 잔 같은 확실하고 단순한 진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시인만의 희망이 아니라 2014년 4월 16일 이후를 살아 내는 대한민국 소시민들의 희망이 아닐까.

1987년에 내놓은 첫 번째 시집 『매장시편』부터 2017년 7월에 내놓은 아홉 번째 시집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까지 임동확의 시가 여태 그러하였듯이 ‘매장시편’에서 ‘생성시편’으로 향하는 노래들은 ‘벌거벗은 것’들이 놓인 길을 밝혀 주며, 시의 길눈도 밝혀 줄 것이다. 그러한 길 위에서 독자인 우리도 운명처럼, 그의 부름, 노래 부름을 연이어 기다린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운석
안압지의 밤
저녁이 온다
고요는 힘이 세다
이중섭展
김종삼 음악회
김수영 문학관
장항선
시간의 성채–증도 1
시간의 발굴–증도 2
녹두서점–시간의 행로
보라매 공원
가을 음악회

2부
땅끝에서 부르는 노래
첫눈이 왔을 뿐인데
칸나
너의 눈동자
너를 찾아서
사월의 바다
솔베이지의 노래
진혼가–‘4·16 대재난’에 부쳐
눈먼 가수의 노래
돌의 초상–류동훈 열사비 앞에 서서
칼데아인의 밤
용산역
광장의 시간–토요혁명에 부쳐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
무명 가수를 위하여

3부
반복의 노래
식물들의 외로움
연기 수업
거미
월드컵 축구
방어(魴魚)
복면
소낙비
충주역
운명 교향곡
개불알꽃
무제
심장의 노래

4부
야외 수업
영동시편–최하림 시인에게
Untitled
태백산 시론(詩論)
대명매(大明梅)
일지암 가는 길–가수 박양희 후배에게
몽탄역
역사 앞에서
폭풍이 오기 전
거문도 등대

해설 | 노지영(문학평론가)
벌거벗은 것들이 너를 부를 때

작가

임동확 지음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자식들에게 꾸지람 한 번 크게 하지 않은 부모님 밑에서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한 아이로 성장했다. 다만 그 시절 유일하게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대학 입학 직전까지 자신이 시인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릴 적 “글을 쓰면 평생 힘들게 산단다”라던 어머니 말이 ‘씨’가 되었을까? 불현듯 문학도의 길을 선택한 후 뜻하지 않은 역사적 격변에 휘말렸으며, 그로 인해 역사와 개인, 전체와 부분의 문제를 주요 시적 화두이자 삶의 자양으로 삼아 암울하고 험난한 시대를 관통해 왔다. 특히 세상의 모순과 불화에 주목하면서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화해와 소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여전히 알 수 없는 그 어떤 운명의 물살에 떠밀리면서도 그 운명의 부름에 귀 기울이며 힘겹게 돌파해 가는 중이다. 1987년 시집 『매장시편』으로 등단한 이 래, 총 8권의 시집과 각 1권의 시론집과 산문집, 시화 집과 번역시집 등을 펴낸 바 있다. 현재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읽고 배우며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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