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권력

고재종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7년 8월 31일 | ISBN 9788983926661

사양 124x198 · 160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6 | 분야 시집

책소개

세계와 우주를 독학한 구도자로

13년 만에 돌아온 남도의 시인

그동안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을 반영하고 정신적 가치를 담을 수 있는 시 전문지가 되고자 노력해 온 계간 『시인수첩』에서 2017년 6월 「시인수첩 시인선」을 새롭게 선보였다. 여섯 번째로 선보일 시집의 주인공은 바로 고재종 시인이다.

1980년대에 고재종 시인은 고향 궁산리에 대한 시를 썼고 “척박한 농촌의 현실을 일관되게 다루며 문학적으로도 일정한 균제미를 갖추었다”(『날랜 사랑』 해설에서)는 점에서 ‘생태시’, ‘농촌시’를 쓰는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우리를 둘러싼 외적 현실에 대한 시인의 시심은 “자연과의 합일을 노래하기보다는 지치면 자연에서 위로받아 인간의 본질적인 삶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쪽빛 문장』). 이제 시인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진실성을 최상의 언어 감도로 형상화해 내는 데 멈추지 않고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없이 자연을 받아들인다. 또 “생의 본원적 형식에 대한 적극적인 성찰과 탐구에 노력”하면서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두움의 경계를 사색한 오랜 숙성의 시간의 산물을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이번 시집 『꽃의 권력』에는 모두 64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시인은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는 햇살 속을 흐른다 바람은 나무를 관통한다”면서 나무는 ‘구도자’가 아니라고 부정한다(「구도자」). “꽃길에서는/꽃의 권력을 따른다”며 사람처럼 꽃도 독자적 존재로서 권력을 지닌 것으로 본다. “노래하고 반짝이는 강물의 오랜 전통 하나는/타는 울음을 다독이며 멀리 세월을 빗는 일이라네”(「강의 노래」)라며 강물에 삶을 빗댄다. “나의 영혼이 우는 소리”마저 들리는 숲길에서 “나의 말을 버리면”서 혼자인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숲길」). “누구라도 자기 자리에 이르게” 하는 밤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하루가 끝나 가는 즈음 “마음이 경각에 닿을 듯 황혼이 간절해”진다며 사랑의 길을 질문하고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먼 곳을 바라본다.

천생 농사꾼인 시인이 들려주는 우리 운명의 초상

세상은 다 말해질 수 없는 것

“9남매와 부모님까지 열두 식구가 논뙈기도 별로 없이 그야말로 죽세공 하나로 호구지책을 하던 극빈의 시절을 겪었다”는 시인은 열 살 안팎에 세상의 참혹을 알아 버렸다. 고독과 우울 그리고 자폐의 내면 공간 속에 책이라는 존재가 선물처럼 찾아들었고, 책을 통해 자연스레 문학의 표현 욕구를 길렀다.

소설을 공부하고 한창 소설에 빠져 있던 중 5 18 민중항쟁이 터졌다. 혼자 차분히 소설을 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우연히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두 권의 시집을 접했고, 그 감동이 가시기 전 일주일 만에 스무 편의 시를 썼다. 그 시로 《실천문학》 신인상(1984년)을 받았다. 그 후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식물들의 끊임없는 생명력, 정직한 농민의 삶을 시로 승화해 18년간 6권의 시집을 냈다.

시인은 2001년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후, “언제나 젊은 시인으로 남고 싶었으나, 이 상이 주어짐으로써 내 시세계가 세상으로부터 공인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사람은 세상이 싫어 어딘가로 숨어들었다가도 세상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다. 세상은 사람에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 준다. 나는 내 시가 숨어든 사람을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만드는 은근한 그리움 같은 것이었으면 한다”고도 했다.

60갑자를 다 돌고 새롭게 태어난 시인이 들려주는

존재의 자존을 지키는 지혜

시인은 일곱 번째 시집 『쪽빛 문장』 이후 13년 동안 시집 출간을 미뤄 왔다. 시를 포기했던 것도 아니다. 꾸준히 새로운 시적 모색과 삶의 방향을 고민해 왔다. 자신의 시가 ‘농촌시’ ‘생태시’라는 굴레에 갇혀 있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웠다고 한다. 고향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는 시인이지만, 그에게 시와 고향은 애증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긴 세월 탈주를 꿈꾸던 시인은 정신과 육체의 노쇠를 막고 자기 존재의 자존을 지키는 지혜를 얻었다. 결국 다시 바른 시의 길로 돌아온 것이다.

1957년생인 시인은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을 지나 올해 환갑을 맞았다. 백세 장수 시대를 이야기하는 요즘 환갑은 오히려 낯선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겪을 수 있는 모든 해를 겪어 보고 다시 처음의 자리에 선다는 의미처럼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더욱 깊고 예리하다. 시집 속의 작품들은 누추한 굴욕의 삶을 버티는 인생의 황금률을 그려 내고 있다.

마음이 경각에 닿을 듯

간절해지는 황혼 속

그대는 어쩌려고 사랑의 길을 질문하고

나는 지그시 눈을 먼 데 둔다.

붉새가 점점 밀감빛으로 묽어 가는

이런 아득한 때에

세상은 다 말해질 수 없는 것,

나는 다만 방금까지 앉아 울던 박새

떠난 가지가 바르르 떨리는 것하며

이제야 텃밭에서 우두둑 펴는

앞집 할머니의 새우등을 차마 견딜 뿐.

– 「황혼에 대하여」 부분

노을이 점점 붉어지며 낮과 밤이 교차되는 박명의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일컬어지는  시간의 한복판에 시인이 서 있다. 그런데 대답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세상의 일도 모르는데 사랑의 길을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어둠의 시간은 흐르고 시인은 사랑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지만 별들은 무리로 하늘에 떠 싱싱한 어둠의 공간을 이룬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시공의 연속에서 사랑은 지속되고 시인은 이 풍경 속에서 인간의 우주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얻어 내는 우리 인생의 지혜다.

자연과 시간에 기대어 얻어 낸 알찬 사색과 귀한 진실

이번 시집은 일곱 번째 시집 『쪽빛 문장』과 어떻게 다를까? 문학평론가 이숭원의 말대로, “예민하고 섬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번민이 가득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나는 대낮에도 자꾸 봉두난발에 휘감겼다

휘감겨 넘어진 우울을 빗고 그렇게

명상하기 위해 신을 내몰았다는 어느 현자처럼

나는 절망하기 위해 귀찮은 신을 내몰았다

낙엽처럼 가벼운 말엔 넋을 놓고

둥치의 묵중한 말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세상에서

내 안에서 끝없이 지속시켜 온 열정이

내 안을 다 태워 버린 후 발견한 문 한 짝,

가만 보니 자물쇠는 담장 저쪽에서 잠겨 있었다

나는 어떤 출구도 찾지 못한 게 아니라

애초에 입구가 막힌 삶을 살았던 것이다 – 「국외자」 부분

자신이 그곳의 버러지 같다고 느낄 때와

버러지 같은 세상에서 더는 못 살겠다고 느낄 때를

분명코 일별할 줄 아는 그, – 「한 알코올중독자를 위하여」

어쩌면 우울하고 참혹한 현실을, 냉정하면서도 온화한 시선으로 거짓되지 않고 섬세하게 그려 낸 시어가 시에서 멀어져 있던 독자들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강의 면목이라면 면면한 유수와 범람,

강물 따라 걷는 마음은 넘치고 또 흐르네.

보리숭어며 비오리 떼가 튀고

창졸간의 갸륵한 것들이 좋이 울어도

순간의 꽃보다는 이야기로 더 유장할 터,

금결은결 반짝이는가 했더니 금세

그리움의 파란으로 일렁이는 시간 아닌가.

한때는 한도 없이 파닥거렸던

강변 은백양 잎새와 첫사랑의 흑단머리는

바람의 갈래 갈래로 흩어지고

오늘은 강가에 퍼지는 라일락 향기,

강섶을 일구는 고라니며 노인장과 함께

또 무엇, 그 누구로 흘러드는 구름 떼라니!

구름이 깊어지면 강물도 높아져서는

서러움 밖의 그 무엇이라도 소환할 듯한 모색,

서녘 놀이 비쳐 든 갈대밭 속의 연애 너머

썩지 않고 들끓는 고독의 항성으로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그런 유정의

경계 같은 것들을 오늘도 추문하는 것이랴.

흐르는 강에 차마 가닿지 못하고

사소한 마음 하나에도 수만 물비늘을 뒤채는,

지금은 결락한 꿈의 시간에 기대어

제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강의 명색이여.

– 「시간에 기대어」 전문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시인을 품고 있는데 깨닫지 못할 뿐”이라며 “시(글)를 쓰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소중한 일”이라는 시인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삶이 입구가 막힌 듯이 보이고, 때로는 춥고 눅눅하며, 한밤 늑대 울음일 수도 있을지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나무(「소나무는 푸르다」)처럼 “아무것도 들음이 없이 다 듣는” 할머니(「보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모르고 이해받지 못해서 불행할지라도 이 모든 불행이 우리를 특별히 불행하게 만들지는 못한다(「적조주의보」). 공허와 암전과 우울에 잠기지 않고 시간에 기대어 황혼을 준비하는 시인의 지혜가 시집 전체에 흐른다.

지금은 사라진 꿈의 시간을 다시 떠올리며 그 꿈의 시간에 기대어 오늘의 파란을 견딜 수밖에 없다. 어떻게 견디는가? “제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세로 견디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누추한 굴욕의 삶을 견디는 방식이다. 자신의 안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인간은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고 사랑의 길이 무엇인지 답변할 수 있다. 이것이 고재종이 오랜 진통과 고민과 사유의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면목이다. 그가 고심하여 얻어 낸 인생의 황금률이다. 시간에 기대어 얻어 낸 알찬 사색의 열매에 우리는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 이숭원(문학평론가)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구도자
꽃의 권력
강의 노래

버터플라이피시
공화
산에 다녀왔다
어머니의 집
소나무는 푸르다
밤의 초대
숲길
황혼에 대하여
보살
연두바람에게로의 귀거
易占을 조금 빌리다
거룩한 제단

2부
연애편지 쓰는 동안
사랑의 법문
물의 나라
연애
사랑에 대한 몽상
향기에 대하여
너의 향기를 어찌 견디겠니
꽃 피는 지옥
해조곡
崖月
시간에 기대어
너의 얼굴
별의 음계
화신
자코메티 1
자코메티 2

3부
분홍 초승달
국외자
종유석처럼 울다
空冊
홀로 인생을 읽다
길 위의 연대기
잔광
나 없는 내 인생
생의 처방을 묻다

지옥을 방관할 수 있다니
카프카를 위한 노래
息影亭에 들다
화포별사
별빛의 무게
적조주의보

4부
엠티쿼터
死因
신아귀전
한 알코올중독자를 위하여
무희
별이 빛나는 밤
저 풍찬노숙의 나날
텅 빈 초상
목련의 꿈
마지막 얼굴
평범한 초상
外人들의 노래
고통의 독재
나 저승 가서 헐 일 없으면
수인번호 20140416
도철의 시간

해설 | 이숭원(문학평론가)
그리움의 파란으로 일렁이는 시간

작가

고재종 지음

1957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동구밖집 열두 식구」 등 7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바람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 들』 『사람의 등불』 『날랜 사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쪽빛 문장』과 육필시선집 『방죽가에서 느릿느릿』이 있고, 산문집으로 『쌀밥의 힘』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가 있다. 신동엽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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