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끝에 매달린 심장

이지호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7년 9월 25일 | ISBN 9788983926692

사양 124x198 · 152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8 | 분야 시집

책소개

늦깍이 시인의 첫 시집

절제된 감정과 단정한 시어로

우리 서정시의 자존심을 지킨다

그동안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을 반영하고 정신적 가치를 담을 수 있는 시 전문지가 되고자 노력해 온 계간 『시인수첩』에서 2017년 6월 「시인수첩 시인선」을 새롭게 선보였다. 여덟 번째로 선보일 시집의 주인공은 바로 이지호 시인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건너와 새내기로 선 시인이 세상에 보내는 연민과 사랑

이지호 시인은 「돼지들」 외 9편으로 2011년 창비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래 꾸준히 시작 활동을 펼쳐 왔다. 등단작 9편에 대해 “현실을 아우르는 탄탄한 서정성이 큰 장점”이며, “전통적인 서정의 운행을 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팽팽한 인식을 놓지 않는다”는 평을 받았다. “운문과 산문을 적절히 교직하여 리듬을 만들어내는 능력 역시” 돋보였고, 작품마다 골고루 수준 이상의 성취를 보였다는 점도 부각되었다.

요즘 시단의 흐름에서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 첫 시집을 내는 일은 다소 쑥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읽어 보면 질풍노도의 시기를 건너와 세상의 보편적 가치를 개성적 감각으로 살피는 진경을 만날 수 있다. 시의 전통적 가치를 이으면서 신인다운 패기와 과감한 표현 등은 작품 전체에 사이다와 같은 청량감을 선사한다.

모두 53편의 이번 시집은 등단 이후의 시작 활동의 결정체이다. 시인의 따뜻한 마음에서 발원한 시어는 우리의 시선을 끌기 충분하다. 예를 들면 가로등 아래서 폐지를 줍는 노인(「이팝나무 교지」), 살처분으로 산처럼 묻히는 돼지들(「돼지들」), 조류 독감에 살아서 실려 나가지 못하는 병아리(「조류 독감」), 유물과 동물 뼈, 어린아이 뼈가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우물(「보석함」), 시집간 언니(「윤달」), “폐타이어를 잘라 바퀴를 고치던 아버지”(「고무줄」), “건물을 오르고 남겨진 그림자가 만든 계단”(「검은 계단」) 등 실로 다양하다.

가로등 아래 노인이 폐지를 줍고 있습니다

경적이 울려도 날파리들이 몰려들어도 꿈쩍 않습니다

방해할 수 없는 역사 같습니다

문장과 문서를 수집하는 중입니다

빛나는 문장 몇 개는 이팝나무가 가져갑니다

나무에 흰 꽃숭어리들이 신성하게 피어납니다

저쪽 다른 시계에 맞추어 나타나는 노인

수레를 끌고 어디로 사라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가지의 그늘에 꽃 피는 철이 흔들립니다

비문 가득한 문장의 해독은 나뭇잎 몫이겠지요

해독된 글 위에 다시 쓰이는 문구들

밤마다 이팝나무가 쓴 파지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쓸모없어지는 문자들의 무덤이 있을 거예요

이상하지요 그 파지는 줍지 않습니다

수집된 문장이 차곡차곡 쌓인 커다란 수레

썩어 갈 문자가 표백되어 여백의 봄이 되겠지요

수레가 움직이자

스쳐 지나가는 차량들이 한 문장 같습니다

노인이 떠난 자리

여러 문구가 만든 긴 문장이 나무에 모여 있습니다

올해도 풍년 들어 흰쌀밥 배불리 먹을 것이라는

교지처럼 흔들립니다

 – 「이팝나무 교지」 전문

폭력적이고 각박한 세상에서의 힘겨운 삶을 치유하는 알레고리

“원초적으로 서정시는 자기 표현의 발화를 통해 시인 자신의 자의식을 첨예하게 드러내는 양식”이라는 해설자 유성호의 말대로, 이지호 시인의 첫 시집은 시인의 체험을 기억하고 표현하는 데에서 삶을 순간적으로 파악해 내는 감각이 빛을 발한다. 시인은 반짝이는 이런 감각을 통해 숭고한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을 토로하고 있다. 자연 예찬이나 커다란 이념 지향으로 흐르지 않고 인간의 근원적 존재 원리에 대한 사유와 탐색의 차원을 구축해 간다. 구체적인 일상과 현실을 순간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몽상이나 현실에 머물지 않는 시인의 소박한 깨달음은 꿈과 현실, 상상과 실재 사이의 긴장 속에서 시로 완성된다.

베란다 한 켠에서 햄스터의 심장이 뛴다 소파에서 텔레비전 보는 인간의 심장이 뛴다 텔레비전에서는 사바나 초원 아프리카코끼리의 심장이 뛴다

뛴다는 말끝에

살아 있다는 말끝에

서로라는 말끝에

매달린 심장

햇살이 키우는 심장이 뛴다 물소리가 키우는 심장이 뛴다 외부가 내부의 혈색을 살피며 뛴다

느리거나 빠르게 흐르던 시간이 향하는 집합점(集合點)

손목이 된 시계의 초침

수평이 하나의 찰나로 변해

기울어지는 점

하나의 시계판 위에 각자 다르게 걸려 있던 시간이

햄스터 인간 아프리카코끼리가

어느 한 시점에서 만날 때

심장이 닮아서 멈출 때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를

안아 주라고 심장은 뛴다

 – 「우리는」 전문

「우리는」에 달린 부제 “포유류는 살아 있는 동안 심장이 십오억 번 뛴다. 그러나 멈추는 시간은 다르다.”처럼, 시인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타자들을 응시하고 안아들이는 시인의 몫을 다하고 있다. “서정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시인의 지향대로 또 다른 기억들이 꿈으로, 현실로, 시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이지호의 첫 시집은 낭만과 참여, 내면과 타자의 목소리가 결속한 밀도 있는 감각과 사유의 도록(圖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시인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내면과 일상, 역사의 밝고 어둑한 양면성을 두루 투시하면서, 삶의 심층까지 내려가려는 정신적·언어적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시’란 첨예한 일종의 감각 형식으로, 스스로의 경험적 사유를 감각으로 수렴하면서 존재하는 운동체이다.

 –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신기루
우리는― 포유류는 살아 있는 동안 심장이 십오억 번 뛴다. 그러나 멈추는 시간은 다르다.
돼지들
풍천장어
물은 옮겨 다닌다
부유하는 평수
기가 막힌 나이가 있다
한계령풀
뼈가싯길
일찍 닳은 걸음
조류 독감
이팝나무 교지
검은 계단
서늘한 지점

2부
무늬의 극
목어
흰고래가 살고 있었다
별의 거울
연두의 항체
소리가 끌고 간 저녁
견인차 기다리는 동안
보석함
옻나무
오전의 무게를 올려놓습니다
그린하우스의 봄
맛의 질량
구름의 거푸집
오가피 제약 회사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

3부
부레 없는 상어가 끊임없이 헤엄쳐 바닷속 최강자가 되듯이
고무줄
이름을 바꾼다는 것
몸에서 지친 것은 어디에서 흔들리고 있을까
백제 전설의 밭
다행이다
나비, 블라우스
관상 농업
물의 뼈가 녹아내리다
엄마의 바탕
윤달
사철나무 울타리

4부
광장의 빛
목련우사
텅 빈 행성
화산(華山)
지렁이체
낚이다

돼지
역류하고 있는 아득한 저 아래
식어 가는 식탁
돼지엄마 신돼지엄마 말엄마
그날에

해설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근원적 감각을 통한 기억과 꿈의 형식 ― 이지호의 시 세계

작가

이지호 지음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충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1년 창비 신인문학상에 시 「돼지들」 외 9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시인의 안양공공예술 산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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