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으로 가는 순간들

안숭범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7년 9월 25일 | ISBN 9788983926708

사양 124x198 · 144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9 | 분야 시집

책소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을 투사하는 영사기
시인이자 영화평론가 안숭범의 두 번째 시집

그동안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을 반영하고 정신적 가치를 담을 수 있는 시 전문지가 되고자 노력해 온 계간 『시인수첩』에서 2017년 6월 「시인수첩 시인선」을 새롭게 선보였다. 아홉 번째로 선보일 시집의 주인공은 바로 안숭범 시인이다.

2005년 『문학수첩』 시 부문 신인상을 통해 시인으로, 2009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 평론 최우수상을 받으며 영화평론가로 등단한 안숭범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이 출간되었다. 마치 영화를 상영하듯 소멸된 시간을 되살려 재생하고 있는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에서 시인은 영화감독이 구도 안에 소품들을 배치하듯 기화(氣化)된 시간들, 흐릿해져 더 이상 만져지지 않는 기억들을 감각적 요소로 전환해 미장센의 질서 안에 배열한다. 그리고 그 미장센은 이미지들을 의도적으로 분할하거나 거기에 과도한 수사를 입히는 대신, 롱테이크로 펼쳐 놓는다. 시인은 지극히 섬세한 묘사로 이미지들을 나열하고 호명하면서, ‘꿈’ 같은 지난 생의 구체적인 장면들을 재생한다.

리뷰

롱테이크로 담은 구체적이고 섬세한 기억의 묘사

기억은 불완전하고 선택적이며 현재를 구성하는 데 유리한 방식으로만 호명되기 마련이지만 안숭범 시인의 기억은 보존 상태가 무척 양호해 장면의 온전함과 상황의 객관성, 감정의 주관성을 모두 유지한다. 기억에 대한 시인 특유의 유난한 강박과 집착은 이 두 번째 시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첫 번째 시집 『티티카카의 석양』에 대해 문학평론가 유성호가 했던 말처럼,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사라진 것들, 오지 않을 이름들, 어쩌면 미리 추억했어야 했을지도 모를 사연들을 일일이 호명하고 각인한다”. 특히 시인이 자신의 작품에서 주로 활용하는 영화 기법 ‘롱테이크’ 방식의 이미지 전개 역시 이런 구체적이고 섬세한 기억의 묘사 덕분에 가능하다.
롱테이크는 말 그대로 긴 쇼트를 편집 없이 계속 찍어서 장면을 구성하는 기법으로, 사실성을 극대화해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 속 장면과 동화되게끔 한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이병철 시인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듯, 안숭범의 시를 읽는 일 또한 그러하다”고 말한다. 시와 영화는 매체와 표현 양식에서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미지 구성의 방식과 재맥락화라는 점에서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시 「동숭동, 혹은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에서 시인은 기억 속 ‘동숭동’을 구성하는 형상과 질료를 일일이 호명하면서 이미지들을 마치 영화 속 롱테이크처럼 펼쳐 놓는다. 이는 또한 이미 사라지고 없는 시간들을 향해 가는 “후진하는 언어”다. 이병철이 시인 안숭범을 “기억의 고고학자”라 명명한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존재의 환희와 소멸을 포착하는 롱쇼트의 미학

안숭범이 기억 속 풍경을 이미지로 묘사하는 화법은, 영화 촬영 기법 중 원거리에서 인물과 배경을 함께 담는 ‘롱쇼트’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대상을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할 때 시인은 “그 대상만 가져오는 게 아니라 그 주변까지 함께 ‘떠’ 온다”(이병철). 즉 대상뿐만 아니라 그 주변, 대상이 속해 있는 시간과 공간, 관계 맺은 다른 대상들까지 시로 옮김으로써 생동감을 불어넣고, 그러한 거리 유지를 통해 시적 긴장감을 고조한다.
시적 대상의 주변마저 이미지화하는 시인의 시선은 그 대상을 향한 애정과 죄의식을 담고 있다. 이는 환희와 소멸이 교차하는 실존의 낙차를 포착하고자 하는 시인의 미학과 관계가 깊다. 안숭범에게 시 쓰기는 타자의 소멸 앞에 무기력한 스스로를 책망하고 또 위무하는 소멸의 수용이기도 하다.

시 「양심의 고고학」에서 시인은 ‘죽음’을 ‘죽임’이라고 고쳐 부르면서 자신과 관계 맺은 모든 타자의 소멸에 죄의식을 드리운다. 용천목에 물을 너무 많이 줘서, 피망에 물을 너무 주지 않아서 죽음에 이르게 한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고, “빈 화분 안으로 가는 시선을 도무지 구해 낼 수 없”었던, 타자의 소멸이 진행되는 동안 그것을 중단시킬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한 무력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소멸에 대한 연민과 죄의식은 안숭범의 시를 “후진하는 언어”로 끌고 가는 동력이다. “세기말 훨씬 이전부터 이미 이 세상은 원본 없는 표상의 공간임을, 신과 인간, 희망과 구원이 모두 한 줌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 버린”(이병철) 시인은 대상 및 그 주변을 향한 애정과 죄의식의 고백을 통해, 그리고 지난 시간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즉 ‘시’의 힘을 통해 “한 줌 먼지들을 먼지가 아니었던 시절”(「무교동」)로 부활시키고자 한다.

안숭범에게 시는 온갖 절망과 비애, 소멸의 양상을 기어이 돌파해 내는 신앙이 된 듯 하다. 그가 겪은 세기말처럼, 오늘날 세계는 여전히 불완전한 표상들로 가득 차 있지만 안숭범은 그것들이 “먼지가 아니었던 시절을 사랑하”려 한다. 원본을 잃어버려 허상이 되어 버린 모든 기억들을 먼지 이전의 상태, 즉 형상과 질량, 체온과 숨결을 지닌 구체적 ‘너’로 되살려 내기 위해 그는 시라는 신앙으로 매일 귀의하는 중이다. 이제는 구식이 되어 버린 신실한 믿음을 향해 매일 후진하는 중이다. 그 “신앙에 매달린 기적”이 마침내 영원을 업은 순간, 지난날의 모든 추억과 몽상, 낭만들이 무한으로 함께 간다.

-이병철(시인)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내일을 위한 시간
비정규적 슬픔
불금
분실
못된 형
毒書
非行記
극단적 만남
길게 오는 새벽
우울의 수도
정전
언어가 여백으로 숨는 풍경
루틴한 생활
낙오
낙원상가(樂園喪家)-늙은 기타리스트를 위하여
늦게 등지는 마음
다음 계절에서의 출근
돼지머리눌린고기-너의 빈소에서
우담바라
아무도 죽지 않는 밤
서울 누아르
해고-Do! Go!
하차
피서-심사 결과를 붙임과 같이 안내합니다

2부 화양연화
바람의 환유
오래된 새벽
유해
간척
자취
서성이는 묘지
돌아 섬
여여정사를 듣다
두 번째 흑산도
미확인비행물체
청승
보길도-사연을 들(이)켰다
귀지
그맘때
눈과 소리
밤·밤
다세대 주택
다정하게 말하는
당신이라는 모서리
무교동
생활의 북쪽

3부 멀홀랜드 드라이브
말라기
화옹방조제, 2002
겨울의 절삭
종이와 교양
이른 시
안과 밖
투표
양심의 고고학
Punctum
호우시절
희극적인 세월-광주, 1996
동숭동, 혹은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
마도요가 있는 야경-바다가 읽도록 내버려 둘게
당신 책 어느 페이지로 팔려 나간 노랑
감각과 착념-돗토리 사구
Oughtopia
벤치에 누운 소란
졸업-졸의 업
영화처럼 산책

해설 | 이병철(시인)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을 향해 후진하는 언어

작가

안숭범 지음

1979년 광주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5년 『문학수첩』 신인문학상을 통해 시인으로, 2009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 평론 최우수상을 받으며 영화평론가로 등단했다. 2010년 대산창작기금을 수혜했으며, 시집으로 『티티카카의 석양』이 있다.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한 바 있으며 현재 한신대학교 인문콘텐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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