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바다로 흘러간 눈

한석호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8년 5월 11일 | ISBN 9788983926999

사양 124x198 · 144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13 | 분야 시집

책소개

타나토스로 가득한 인간의 내면

한석호의 시집 먼 바다로 흘러간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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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수첩 시인선’ 열세 번째 시집, 한석호 시인의 『먼 바다로 흘러간 눈』이 출간되었다. 첫 시집 『이슬의 지문』(2013)에서 사물에 대한 사유와 꿈꾸기를 통해 우주의 근원을 향한 원초적 열망을 보여 주었다면, 두 번째 시집 『먼 바다로 흘러간 눈』에서 시인은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 거기에 깃든 고통과 타나토스를 똑바로 응시한다. 대상의 원초적 이미지를 탐구하고, 탁월한 “기교적 역량”(김춘식)으로 그 이미지를 새롭게 변신시키는 성취가 이번 시집에서도 마찬가지로 한껏 드러난다.

한석호 시인은 마흔의 늦은 나이에 등단한 시인으로 1982년부터 경찰 생활을 하고 있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한 웅숭깊은 통찰과 사유로 인간의 본원적 질문에 접근하는 모습이 남다르게 여겨지기도 한다.

리뷰

상처를 드러내려는 주체와 그것을 감추려는 주체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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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20세기 모더니즘의 시대가 되면서 전 세계 예술가들의 관심은 외부의 시대 상황에서 인간의 내면으로 크게 선회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마주친 인간의 내면은 외부 세계와 마찬가지로 어둡고, 병들고, 폭력과 광기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즉 그들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파괴본능과 죽음본능, 즉 타나토스의 존재와 마주하게 되었다.

한석호의 『먼 바다로 흘러간 눈』은 타나토스로 점철된 인간의 고통스러운 내면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보여 준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오민석 평론가는 “지금까지 한국 시들이 기껏해야 내면의 에로스를 불러내거나 사회적 폭력을 호출해 왔다면, 이 시집은 무의식의 이면을 계속 뚫고 들어가 그 안에서 울부짖고 있는 파괴적 ‘짐승’의 목소리를 호명해 낸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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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색깔도 가져 본 적 없지만

나는 가끔 목마른 짐승의 눈빛으로 내 안의

사나운 이빨을 돌려세우곤 한다

겉장도 다 읽지 못한 천문을 열고

새 한 마리 먼먼 광야로 쏘아 보내기도 하고

내 안에 갇힌 서러움을 간지럽혀 웃기도 한다

(……)

읽히지 않는 진실 앞에서 바람은 자주 수묵의 기세로 불고

배고픈 짐승의 눈빛을 잉태한 나는

모든 윤리를 해체하여 묻어 버리고 있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것일까

저 환한 꽃들의 배후에서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수분이 되지 않는 계절이 꽃을 꺾어 들고

캄캄한 나를 비춰 보고 있다

어둠에 갇힌 내 영혼 톡톡 두드려 깨우고 있다

―「거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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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호 시인은 내면의 고통을 파고들어, 그것을 피하기보다는 마주하려 한다. 시인은 “‘망각’보다는 고통의 ‘기억’ 쪽을 선택한다”(오민석). 인간/시인 자신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탐구하면서 그것을 응시/직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내면의 타나토스를 직시하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안정’을 뒤흔드는 일이며, 혼란을 자초하는 일이고, 인간의 치부와 대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 『먼 바다로 흘러간 눈』은 사실상 고통, 상처를 드러내 마주하려는 주체와 그것을 감추려는 주체 사이의 길항의 기록이다. 그러나 결국 시인은 드러냄과 감춤 사이에서의 그 고통스러운 싸움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석호의 시는 고통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 언어는 그리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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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끼만 머물러 주시면 어떨까요,

한 시절의 몰락을 정리해야겠습니다.

펼친 시간을 다 접지 못했다면

캄캄하게 갇히는 날이 많아질 것입니다.

(……)

무수한 무용담이 걸어 다니는 이 전선도

철군의 나팔소리 하나면 다 정리되고 말겠지요.

오늘 한 끼만 머물러 주시면 어떨까요,

당신의 체온을 찾고 싶은데 도무지 만져지지가 않습니다.

―「메꽃」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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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스를 무너뜨리는 힘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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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봉된 상처를 드러내고 그것을 치유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이는 스스로의 내면을 파헤쳐 고통스러운 진실을 드러내는 “‘가혹한’ 수행”(오민석)과 같다. 시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고통을 마주하려는 것은 그 자체로는 타나토스지만, 그 고통을 껴안으려 한다는 점에서 에로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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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외과 병동을 열고 들어서는

저것은 국경 밖에서 온 시베리아 칼바람

기다리던 봄 햇살이 아니라

내 옆구리 들이받아 공중 낙화 시켜 버린

브레이크 없는 트럭

견고하면 두려움에게 걷어차이고

사소하면 달의 눈썹만 봐도 글썽해진다

한 번도 외로워 보지 않은 자

오래도록 그리움에 가닿아 보지 못한 것

시간의 발자국 앞에 엎드린

바람이 제 꼬리를 물고 목청껏 짖고 있다

불멸의 사랑이란

눈 속에 갇힌 고양이의 울음을 꺼내 핥아 주는 것일까

병동 앞 튤립나무가

온몸에 초록빛 종소리를 매달고 있다

굳어 버린 깁스 속의 사랑아

네 심장에도 피 돌고 칼바람 무디어지고 있는가

미치도록 안고 싶은 삶을 데리고

나 저 레일 위를 미끄러지고 싶다

봄날이 연둣빛으로 물드는 병동 밖 저 국경의 밤을 향해

―「튤립나무가 보이는 병동」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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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 갇힌 고양이의 울음을 꺼내 핥아 주는 것”, 즉 상처를 드러내 껴안는 것이 바로 “불멸의 사랑”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고통스러운 내면을 감추는 것은 눈 속에 갇힌 고양이를 계속 거기에 가둬 두는 일이다. 그러나 눈 속에 갇힌 고양이, 즉 내면의 타나토스를 직시하자 “병동 앞 튤립나무가 온몸에 초록빛 종소리를 매달”게 된다.

한석호 시인은 인간의 보편적인 타나토스를 집요하게 탐구하면서도 그 모든 타나토스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힘의 근원을 알고 있다. 그것은 “눈 속에 갇힌 고양이의 울음을 꺼내 핥아 주는 것”, “날지 못하는 것들을 품어주”는 것(「먼 바다로 흘러간 눈」), “사라진 것들의 비명을 찾는 따뜻하고 안쓰러운 궁구”(「밤의 흉곽에 깃든 입술 자국」)와 같이, 타나토스에 맞서는 에로스의 힘이다.

더불어 “먼 바다로 흘러간 눈을 기다리는” 등대의 모습이 시인의 또 다른 자아일 것이다. 시인이 그린 시인의 자화상, 한석호 시인에게 시 쓰기는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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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시인의 말

1부 꽃들이 졸기 시작하면 모닥불을 피우고
내소사
저문다는 것은
몰이
고래와 봄날
빗방울의 인칭
먼 바다로 흘러간 눈
푸른 밤의 앵글
자화상-살바도르 달리풍으로
카페, 바그다드
현기증
달빛에 금붕어 키우기
첼로가 있는 밤의 시제
꽃의 환기
묵화

2부 죽은 꽃들이 터뜨리는 폭죽 소리
감정의 타향
미늘과의 포옹
수레국화가 필 무렵
묵티나트
지워진다는 것에 대하여-함양 농월정에서
녹슨 꿈 쪽으로, 한 뼘 더
밍크고래가 돌아오는 계절
불의 전차
포커, 혹은 당신이라는
주산지
찬란의 방식

3부 먼지를 덮어쓰고도 체온을 놓지 않는 거미
박명
낙조에 들다
푸가-매몰되는 가축들을 위하여
밤의 흉곽에 깃든 입술 자국
산벚나무 그늘에서 읽는 타로카드
복제된 꿈
21세기를 애도하다
가혹한 봄날
바람에 젖는 기타의 감정-고트프리트 벤에게
기억은 사육되지 않는다
바람의 관할
거울
문장들
위험한 동화

4부 나는 오늘도 내린천을 지휘하고 있다
오리
설국의 무렵
마름질
굴뚝이라는 높이
내린천 오케스트라
메꽃
튤립나무가 보이는 병동
구름법원장으로부터 온 편지
지리산 노을
푸른 교실
테크노댄스
돌그릇
천전리 암각화
강릉 남대천
장맛비
정적(靜寂)
소나티네

해설 | 오민석(문학평론가)
고통의 내면을 응시하기-한석호의 『먼 바다로 흘러간 눈』 읽기

작가

한석호 지음

1958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 200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이슬의 지문』, 앤솔로지 『2008 젊은 시』 『2010 젊은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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