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휘민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8년 10월 31일 | ISBN 9788983927125

사양 124x198 · 168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18 | 분야 시집

책소개

삶의 근원적 고통을 들여다보는 습관의 기술

휘민의 두 번째 시집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우리 시대의 새로운 감수성을 담아내고자 기획된 ‘시인수첩 시인선’이 열여덟 번째로 선보이는 시집은 휘민 시인의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이다. 첫 시집 『생일 꽃바구니』(2006)에서 삶과 기억을 우러르면서도 현대 문명의 폭력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비정한 세계와 대면했던 시인 휘민은 12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등단 당시 일상생활의 체험을 탄탄한 언어로 묘사했다는 평가와 함께 “낮은 곳을 살피는 생명의 눈을 가졌다”는 찬사를 받았던 시인은 본명 박옥순을 버리고 휘민이라는 필명으로 오래전부터 새롭게 시인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이번 시집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에서도 그간 시인에게 고정되었던 인식의 틀을 스스로 벗어버리고 새로운 개성과 미학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려는 변신을 위한 각고의 노력이 행간에 녹아 있다. 시인은 삶의 근원적 고통을 “습관의 기술”로 움켜쥐고 스스로 그 혹독함 속으로 들어간다. 시집 곳곳에서 시인이 그리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일상은 비애로 가득하다. 시인에게 산다는 것은 “누구나 자기 몫의 어둠을 길들이는 일”이자 “슬픔의 모서리를 숨통처럼 둥글게/둥글게 깎아 내는 일”(「숨은 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주도 없이 곧장 게으른 심장에 꽂히던/엇박자로 시작되는 이율배반의 노래”(「모독」)처럼 모순으로 가득한 것이기도 하다. 급기야 화자들은 자아 부정과 파괴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단순히 현대인의 일탈된 내면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매혹적 파장과 섬세한 무늬가 가득한 시집이다.

 

1.

태어남이 내겐 모독이었다

 

(……)

 

검은 뿔테 안경을 벗어던지고

코를 서랍 속에 묻어 두고

수천수만 번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태어남이 나의 경력이 될 때까지

―「모독」 부분

 

이 시에서 화자는 “종갓집에 시집와 내리/딸 다섯을 낳은 어머니”와 “풍 맞은 손 부들거리며/강보에 싸인 나를 떠밀던 할머니”를 시작으로, “타자기와 주판이 지겨워/삼 년 내내 휘파람만 불”던 일, “시도 때도 없이 커피를 타게 하던/상사의 입김”, “미성년자의 손목을 움켜쥐고/천연덕스레 카바레로 향하던/회식날의 억센 손길” 같은 자신의 삶을 “몇 개의 삽화로/짜깁기”한다.

이러한 기억들은 화자의 삶 전반에 걸친 멜랑콜리를 더욱 심화하며, 그럴수록 생의 의지는 줄어들고 죽음과 자기 상실의 감정은 증폭된다. 화자는 자아에 예민해지면서부터 존재 상실에 따른 자아의 모독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그러한 모독을 견디고 넘어서기 위한 미학이 새롭게 탄생한다. 시인은 삶의 의지를 꺾으려는 멜랑콜리에, “리듬”처럼 흐르는 “경력”과 “습관”으로 맞선다.

 

누군가 먼저 일어나 버리면 사선으로

버티고 선 일 미터의 긴장이 무너질까 봐

서로의 팔꿈치로 테이블 모서리를 고정시킨 채

폭설이 쏟아지는 휴게소의 오후를 붙들고 있었던가요

 

(……)

 

도무지 식욕이 일지 않는 봄날의 식사처럼

느리게만 움직이던 당신의 숟가락질을 기억해요

나는 당신의 더딘 리듬에 발맞추느라

허물이 벗겨진 입천장으로 콩자반을

하나씩 씹고 또 씹고 있었지요

―「봄날의 식사처럼」 부분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최현식은 이러한 화자의 되새김이 “달큰한 미감 대신 혹독한 환부(患部)로 돌입하려는 자아 투기(投企)의 열렬한 드러냄”에 관계된다고 말한다. 냉철한 동시에 열렬한 시선으로 일상 속 고통을 들여다봄으로써, 그것을 “자기 몫의 어둠”으로 길들이려는 것이다. “숨”이 “후우 하고 내뱉고 나면/가슴속까지 편안해지는 말”이면서 “바닥까지 내려놓으면/돌멩이처럼 싸늘해지는 말”(「숨은 꽃」)이라면, 두 정의의 순서를 바꿔서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숨”은 “바닥까지 내려놓으면/돌멩이처럼 싸늘해지는 말”이면서 “후우 하고 내뱉고 나면/가슴속까지 편안해지는 말”이라고. 이 반전의 멜랑콜리는 절망의 습관적 부정이 아닌 희망의 발견을 통해 입체화될 수 있다.

 

 

고통의 근원과 그것의 미학적 개진

 

‘행복’과 ‘가족’은 이 시집에서 휘민이 깊이 천착하고 있는 두 개념이다. 그러나 흔히 삶의 기초를 이룬다고 이야기되는 이 두 개념은 시인에게 맹목적 믿음이나 추구의 대상이 아니다.

 

어둠이 바늘땀 성긴 겹옷 하나 벗어 놓으면

잠은 구겨진 모서리를 껴안고

의식의 바깥을 더듬어 간다

이불 속에서 스치는 두 개의 체온

아이의 입가에 흘러내린 따뜻한 침은 내게 말한다

 

행복,

믿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는 불완전한 주문

 

가족,

서로 다른 종(種)들이 신들의 계보를 훔쳐서 만든

텅 빈 기억의 교차로

―「습관의 기술-거머리와 함께 여행하는 법 3」 부분

 

이 시에서 화자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속한” 그 “기이하고 낯선 언어들”의 시공간을 “오래도록 들여다”봄으로써, 어느 순간 균열과 미비로 얼룩진 ‘행복’과 ‘가족’을 새로운 ‘친밀’과 ‘소통’의 세계로 불러들이지만, 이는 ‘불화’의 어떤 극점과 현재를 차분하게 호출함으로써 얻은 고통과 슬픔의 역설적 응축물이다.

시집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에 실린 가족에 관한 시는 대부분 가부장적 권력의 횡포와 그에 희생된 여성들(본인, 어머니, 언니)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의 모습을 띠고 있는 가부장적 권력은 “쉼 없이 건전지를 갈아 끼우며” “빛바랜 훈장의 고집”을 “오늘까지 끌고” 오고(「시간을 모으는 사람」), “장죽에 연초를 갈아 끼우며/적자의 등골을 빼먹”고(「레고랜드의 상속자들」), “울음 끝을 삼키며 아버지를 불렀으나” “그곳에 없었다”(「모독」). 그러나 이 시들은 단순히 가부장제의 폭력성과 퇴폐성을 비판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시 「점묘」에서 화자는 아버지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쳐 보며 “오늘은 당신과 내가 너무 가까워서 슬프다”고 생각한다. 이는 ‘슬픔’과 ‘고통’이 삶의 비극적 본질일 수밖에 없음을 잘 말해 준다. 그리고 “모독”을 견디는 미학이 탄생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고통 또한 미학적 개진으로 이어진다.

 

엄마는 날마다 양은냄비를 닦았어요 모지랑 숟가락으로 냄비 바닥을 긁고 철수세미가 끊어질 때까지 시커먼 밑을 문질러 댔어요 (……)

 

엄마, 너무나 많은 빛을 품었지만

온몸이 구멍이었던 당신

 

잘 지내나요?

내 슬픔의 환한 동공

―「밑」 부분

 

“열아홉에 아홉 남매의 맏이에게 시집와 삼촌들의 코를 닦아 준”, “쌀독 바닥을 채우느라 딸들의 초경도 몰랐던 엄마”는 시 속 화자의 트라우마와 시 전반에 걸친 멜랑콜리의 근원이다. 또한 삶의 비극을 움켜쥐고 들여다봄으로써 상처를 다스리는 역설적 미학의 근원이기도 하다.

 

 

점묘로 그려진 멜랑콜리

 

독자들은 시집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곳곳에서 고흐의 그림처럼 점묘된 멜랑콜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시 「직소퍼즐을 맞추며」는 그 자체로 고흐에 대한 뛰어난 오마주다.

 

당신은 어둠을 싫어했지요

그래서 빛을 파종하듯 밤하늘에

고독을 심어 놓았는지 몰라요

끓어오르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어둠 속에 환한 구멍을 뚫어 놓았는지 몰라요

 

(……)

 

오늘 밤 나는 당신이 우주의 리듬을 발견하던

그 순간을 훔쳐보는 한 마리의 까마귀죠

낮 동안 오베르의 밀밭 사이를 서성이다가

당신의 그림자 뒤에서 불타오르는 삼나무 가지에

 

(……)

 

빈센트,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변죽부터 울리며 천천히 다가갈까요 아니면

꿈틀거리는 별들의 심장으로 곧장 내달릴까요

―「직소퍼즐을 맞추며」 부분

 

실제로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슬픔 때문에 방황하게 되는 절망적인 멜랑콜리 대신 희망을 갖고 노력하는 멜랑콜리”를 택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휘민은 “비애와 함께 우주를 건너가는”(같은 시) 고흐의 노력하는 멜랑콜리를 불러들여 불행한 의식과 적극적으로 한 몸을 이룬다. 그리하여 자존과 신뢰를 담은 이 시집의 핵심 구절에 이른다.

 

이 생을 한 번 더 믿어 보기로 한다

누구에게나 생의 절반은 잠복기일 수 있다

―「점묘」 부분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리듬의 탄생
직소퍼즐을 맞추며

점묘
자오선이 있는 수평 해시계 판
체류
중력에 대하여-거머리와 함께 여행하는 법 2
습관의 기술-거머리와 함께 여행하는 법 3
생활의 달인-거머리와 함께 여행하는 법 4
슈퍼문
물그림
무극 일기
시간을 모으는 사람
언니가 두고 간 물거울

저녁

2부
흑백텔레비전에 대하여
달과 모딜리아니
당신이 수화기 저편에서
눈동자의 안부를 묻다
칼의 춤
서른아홉
이상적인 관객
단추의 바깥
피싱 투데이
시간제 노동자
트리거
플라스틱 트리
세렌디피티! 영화는 그렇게 시작되고

알비노
레고랜드의 상속자들

3부
몰골법
봄날의 표정
풍경의 그늘-거머리와 함께 여행하는 법 5
초대
가족음악회
대야미에서
애창곡
말없이 거미를 바라보게 되는
뺄셈의 공식-거머리와 함께 여행하는 법 6
된서리
악어 길들이기-거머리와 함께 여행하는 법 7
모빌리코르푸스
오토리버스
속도의 오르가슴
껍질

4부
프롤로그-거머리와 함께 여행하는 법 1
락앤락

기린
슬픈 역광-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봄날의 식사처럼
숨은 꽃
풍등
소리굽쇠의 공진
파란 대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독
비어 있는 목구멍을 위한 시간
만호크레이터
시집
창 너머

해설 | 최현식(문학평론가)
비애의 리듬, 고독의 점묘

작가

휘민 지음

197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 『생일 꽃바구니』를 펴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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