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

정선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9년 4월 26일 | ISBN 9788983927439

사양 124x198 · 144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23 | 분야 시집

책소개

뱀파이어 혹은 프롤레타리아

안부 없이 떠도는 정선 시인의 두 번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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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시법(詩法)은 게릴라를 닮아 있다. 우리 시단의 어떤 사조나 흐름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만의 독법으로 세상을 읽으며 이를 개성적 언어로 형상화한다. 때론 원초적 몰락을 향해 유유히 걸어 들어가는 나그네나 온몸을 불사르는 광인의 모습으로 분하기도 한다. 위태로운 문장 속에서 이미지의 폭발을 시도할 때는, 단 하나의 폭탄을 가슴에 안고 적진 한복판으로 주저 없이 나가는 테러범 같기도 하다. 그의 시는 분명 다국적 연합군이나 잘 훈련된 정규군의 전략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난해하거나 관념적이라 할지라도 행간의 긴장을 통해 응축해 놓은 그의 시적 폭발력은 우리 시단에서 쉽게 목격할 수 없는 풍경을 그려낸다. 누가 눈여겨 보아주지 않아도 독고다이로 맞장 뜨는 시인의 운명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그를 한번 제대로 읽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기도 한다.

웅크리고 있던 기억과 감각과 충동 들을 그러모아 정선 특유의 시적 발화를 선보였던 첫 번째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가 시인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번져 가게 하는 이중적 미학을 보여 주었다면, 이번 시집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에서는 앞선 시집에서 치유했던 상처와 기억 들을 질료 삼아 거침없는 모험을 감행한다. 첫 시집에서 과감하게 선보였던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도리어 흐름을 형성하여 스스로가 나아갈 길을 내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이에 해설을 맡은 김병호 시인은 “고정된 기존의 감수성과 상상력, 사유 체제로는 다가설 수 없는 신선한 자극과 충격”을 정선 시의 ‘전제 조건’이라고 평하며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과 사랑에 대한 사유와 감수성이 여타의 시인들과 달리 크고 다채롭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정선 시인의 이번 시집은 매우 뜨겁다. 시인을 다그치거나 할퀴었을 뭇 기억과 상처 들이 시라는 화로에 던져져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한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보이게 됨으로써 조금쯤 홀가분해졌는지도 모르겠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말 주머니를 쏟아 말끔히 비워 냈기에, 스스로를 옭아매던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리라. 그러하기에 시인은 비로소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보듬을 수 있”(‘시인의 말’)게 된 것이다. 그럴 수 있기까지 시인은 어떤 시간을 건너온 것일까. 그 시간의 주름 속에는 어떤 사연들이 자리하고 있을까.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 속에 그 시간과 사연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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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로서 황홀경을 창조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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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울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표식이다. 시인은 “피 한 방울만으로도 황홀경을 창조”할 수 있는, 위대한 뱀파이어들을 ‘예술가’라고 일컫는다. 그들은 피 한 방울만으로 “한 폭의 그림이 되고 시가 찬양을 하”게 하는 존재들이다. “치사량의 우울”을 필요로 하는 예술가로서의 숙명을 수긍해야만 상처투성이의 자신을 기꺼이 받아 안을 수 있는 까닭에 정선의 시에서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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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지금은 건기, 별빛 휘장을 두르고 갈증의 등뼈로 기둥을 세우는 곳 호흡조차 쩍쩍 갈라진 사각동굴 바닥에는 광기가 깡통으로 뒹굴고 있다 당신들이 새끼 잃은 승냥이 속울음을 어둠 속에 풀어놓으면 한 폭의 그림이 되고 시가 찬양을 하고 당신들은 피 한 방울만으로도 황홀경을 창조하는 예술가, 위대한 뱀파이어들

―「뱀파이어를 위한 노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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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은 지구를 몇 바퀴 돌아도 스러지지 않”(「우울백서」)는다는 것을 알기에 “오래도록 우울로 이글거”리겠다고 말하면서도 시인은 “발톱을 세우고 몸을 더듬”으며 “우울의 정글을 키”우는 뱀파이어들의 광기와 우울로는 그 어떤 감흥도 얻을 수 없는 오늘이 왔다고 말한다. 이제 시인은 “검붉은 피”가 아닌 푸르게 재생된 녹색 피를 갈구한다. “지금은 피를 바꾸어야 할 녹색의 시대”라고 선언하면서 말이다. “망아지를 길들이듯/나를 순치하려 들지”(「피란으로, 피란 갈까부다」) 말라고 외치는 시인에게 녹색 피는 곧 “반골의 증표”인 “야생”을 상징한다. 피를 바꾼다는 것은 곧 기존의 혈통을 부정하는 일. 이제껏 제 몸속을 흐르던 피를 송두리째 뽑아내고 새로운 피를 주입하는 그 일은 전 존재를 갈아엎는 거대한 작업이다. 그 중대한 전환의 시점, 시인이 취할 ‘다음’ 포즈를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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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혁명을 도모하는 치열한 유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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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아직 발붙일 곳을 정하지 못했다. 아니, 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정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지불식간에 시인 자신이 일구어 나갈 시 세계를 탐색 중인 까닭이다. ‘길 없는 길’에서 갈망하는 사랑 그리고 자유는 ‘과감한 시적 유랑(流浪)’, 즉 모험을 감행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정처 없는 떠돎이기에 위태롭지만 열정적인 그 여정의 기록은 읽는 이로 하여금 ‘전율’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전율과 공감 사이,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자신의 시와 자신의 혁명에 치열한 탐구와 헌신”(김병호)을 마다하지 않는 시인의 열정이 베어 난다. 시인은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이룩한 혁명의 대명사인 ‘벨벳혁명’”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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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결정은 폭설처럼 덮쳤다

밤의 궁륭을 떠돌다 역설을 질문한다 도대체, 라고 묻기도 전에 미세먼지 속에서 꽃들은 피어났고 어차피 꽃들은 금세 흐를 것이었다 위태로운 문장들이 수작을 걸었다 어차피를 버리면 때 묻지 않은 아말피가 가까워진다고 그래 아무것도 캐묻지 않는다면 머잖아 내 넓적다리에서는 사과가 열릴지도 몰라

뻥 뚫린 옆구리에 주먹을 넣어 본다 옆구리는 아직 덜 아물었고 주먹은 더 이상 주장을 하지 않는다

사랑스런 아말피가 잠든 그곳에는 사심 없는 친절이 레몬향으로 퍼졌다지 선글라스 속 음모도 태양으로 환하다지 목적 없는 돌멩이들은 대가도 없이 밤새 온몸으로 노래를 부르고 말이야

참담함도 모두 아름답게 장례하는

아, 말, 피.

사과를 버리자 내 곁엔 제자리에서 나고 자라고 죽는

나무나 풀밖에 남지 않아 너도 그렇니? 벨벳혁명을 꿈꾸는 게으른 자 아말피로 가자구

네가 베어 버린 온기

내가 짊어질 아픔

호의가 공기를 떠돌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한 사람은 알지 미소 뒤의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파도가 들려주는 전설에 맞춰 네 잇몸이 기타를 칠 때까지 요긴한 것은 한 줌 혁명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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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살을 찌푸리는 건

그나마 너에게 여지가 있다는 신호지

―「도대체에서 아말피까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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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문장들이 수작을 걸”(「도대체에서 아말피까지」) 때면 자신을 “키운 은둔의 사막에 절규 한 척을 띄워 보”(「오 라팽 아 질」)내곤 하는 시인의 시적 유랑은 시 속에서 낯선 여행지의 지명으로 표상된다. 그중 스페인의 ‘말라가’, 이탈리아의 ‘아말피’는 생경한 이국의 풍경과 함께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온 감각을 깨운다. 마치 목적 없는 여행(유랑)처럼 언어 스스로 자유롭게 흐르도록 풀어놓는 시적 야생성은 자유를 동경하고 염원하는 시인의 짙은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 끊이지 않는 갈증이 시인으로 하여금 길 없는 길을 떠도는 과감하고도 치열한 시적 유랑을 멈출 수 없게 한다. 바로 그 힘이 시인 자신과 그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전율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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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율의 순간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단속하며 내부적으로는 수렴의 공간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는 감상의 주체인 독자가 정선 시인의 작품에서 전율을 공감한다는 것이며, 자기 자신의 에고가 무너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다. 전율에 의한 무너짐은 어떤 열기나 각성보다는 오히려 차가운 자기 성찰과 인지의 충격에 의한 것일 확률이 높다. 특히 정선 시인의 경우에는 말이다. 깊은 사유와 사색이 돋보이는 그의 시편들을 읽고 경험을 공유하게 될 때, 독자는 시인이 스스로를 초월하고자 하는 간절함의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인지적 충격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해설, 「위험한 매혹과 위태로운 문장 사이」 부분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말라가, 말라가
보라는 아프다
고갱을 묻는 밤
결핍을 죽이는 방식
도대체에서 아말피까지
작업의 정석
달걀 한 알
밥에 대한 질문
고흐, 리듬 앤 블루스
도도 죽이기

2부
봄을 맞이하는 자세
불가촉 불가촉
볼기의 탄력이 떨어질 즈음 사랑도 끝났다
오 라팽 아 질
감정노동자 B형
피란으로, 피란 갈까부다
모나크나비들
음악이 없는 나라
via 인생은
뱀파이어를 위한 노래
한때 프롤레타리아

3부
어슬렁어슬렁 어슬렁
혁명은 아랫도리로부터 시작되지
우물, 그 감정사막
리버랜드
절규 한 척을 띄워 보낸다
이탈리아 이딸리아
궁금증후군
그릭요거트를 바라보는 자세
휘게풍으로 놀아나기
불협(不協) 팔월
깡을 살짝 얹은 비굴카나페

4부
고도는 매일 온다
격렬鄙劣도
우울백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랭보와
뭉갰다 그러자 시시해졌다
슬픈 네버랜드
늪과 달빛과 여자와
씨앗
혈통의 재구성
무창포(無唱浦) 레퀴엠
양꼬치가 익어 가는 밤에는

해설 | 김병호(시인․협성대학교 교수)
위험한 매혹과 위태로운 문장의 사이

작가

정선 지음

2006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 에세이집 『내 몸속에는 서랍이 달그락거린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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