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씨의 오지 입문기

조미희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9년 5월 21일 | ISBN 9788983927477

사양 124x198 · 168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24 | 분야 시집

책소개

달나라로 향하는 위태로운 생의 줄타기

그리 멀지 않은 오지에서 써 내려간 조미희의 첫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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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이 들어찬 모노톤의 도시 한복판, 파리한 얼굴의 자칭 씨가 서성이고 있다. 길을 잃은 것이다. 난생 처음 발 딛는 세상 끝도 아니건만, 자칭 씨에게 이곳은 분명한 ‘오지’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문명에서의 오지”(「오지로의 입문」)인 것이다. 조미희의 첫 시집 『자칭 씨의 오지 입문기』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힘이 지배하는 ‘현대판 오지’에서 생명줄을 부지하기 위해 “이자와 실직과 월세의 나무줄기를 잡고 곡예를” 하며 이상향의 ‘달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자칭 씨의 생존기와 다름없다. 시인은 ‘오지’에서 분투하는 이 시대 ‘자칭 씨’들의 일상을 그려 냄으로써 삶의 무게와 애환을 여실히 보여 준다. 더함도 덜함도 없이 담담하게 새긴 소시민의 내면과 일상의 풍경은 “잿빛”(「달을 갉아 먹는 집」)을 띤다.

2015년 <시인수첩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온 조미희 시인은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일상을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한 번쯤은 되돌아보게 만드는 감각의 운용이 돋보인”(최현식)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시인은 생의 단면들을 포착한 60편의 시로써 하나의 조각보를 완성하였다. 이 조각보에는 다양한 표정의 가난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무심히 바라보면 그저 개개의 그림이 무작위로 흩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골똘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낯익은 형상이 떠오른다. 하루하루 버거운 삶의 시름을 삼키며 자기 몫의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군상 말이다. 언어라는 바늘에 상념이라는 실을 끼워 닳.아지고 구멍 난 현실을 한 땀 한 땀 기운 시들은 그래서 도리어 따듯하고 안온하다. 온기를 간직한 이불처럼 읽는 이의 내면을 포근하게 감싸는 이 시집은 타인을 향한 따스한 시선과 사랑을 잃지 않은 까닭에 잔잔한 위로가 되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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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조금씩, 달나라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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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노력으로도 애씀으로도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문제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지도, 막무가내식의 똥배짱을 부리지도 않는다. 이 견고한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시인은 읊조릴 뿐이다. “겨울에서 오래도록 연체”되고 있다고. “십이월은 나무들만 추운 게 아니”라고. “아무리 뒤져도 일밖에 없는 계절”에 “최저임금 상승만큼 살짝 올라가는/1월의 기온을 기다린다”(「십이월」)고. 차가운 겨울, 가만가만 새어 나오는 입김처럼 서늘한 독백에는 은은한 슬픔이 묻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달프거나 구슬프지 않다. 시인으로 하여금 이 팍팍하고 먹먹한 현실을 덤덤히 살아 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생의 ‘의지’ 그리고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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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예민하게 문을 두드렸고 나는

무국적자처럼 떨었다

저녁 대신 설탕도 넣지 않은 내일을 마셨다

창틀로 고요가 시끄럽게 쏟아진다

인생은 이렇게 중독성으로 살아내는 것

커피색에 모두가 어두워진다고 생각했다

문이 없는 세상이 통째 나를 삼켰고

거미가 흔들리는 집을 지었다

환하게 보이는 사생활

흔들려도 살 수는 있겠지?

 

양 떼 같이 몰려오는 눈송이를 세며 눈을 감는다

오늘 꿈은 맑았으면 좋겠고

봄볕에 졸고 있는 햇병아리 한 마리 사고 싶다

 

달이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로 반짝 떨어졌다

―「달을 갉아 먹는 집」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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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떼처럼 눈송이가 날리는 가운데 가만히 눈을 감은 시인은 “오늘 꿈은 맑았으면” 그리고 “봄볕에 졸고 있는 햇병아리 한 마리” 살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는다. 이런 소박한 염원이 담긴 시인의 ‘기도’는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로 반짝 떨어”지는 ‘달’로 표상된다. 달은 곧 시인의 희망이 담긴 기도 그 자체인 것이다. 달(달세)이 갉아 먹히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무국적자처럼 떨”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시인은 결코 의지를 꺾지 않는다. “흔들려도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매일, 조금씩, 달나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인의 희망 어린 기도가 차곡하게 쌓인 내밀한 달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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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희의 시 세계가 조세희의 소설 세계를 계승한 면 중에서 ‘달나라’의 상징은 주목된다. 조세희의 소설에서 난쟁이는 달나라를 자신의 이상향으로 삼고 날아오르려고 했지만 가난과 소외감으로 인해 이루지 못했다. 난쟁이가 꿈꾸는 달나라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 공간이 아니라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 지상 세계이다.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228쪽)인 것이다. 조미희가 추구하는 달나라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시인은 사회적 존재로서 달나라를 포기하지 않고 날아오르려고 하는 것이다.

―해설, 「난쟁이의 달나라」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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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도 그만할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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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으로 막을 수도 중단할 수도 없는 현상들이 있다. 순환하는 계절, 무시로 변하는 날씨,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사랑……. 오지 마라, 그만해라 말해도 올 것은 오고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만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시인은 이미 온 “봄에게 그만하자/그만하면 됐다고 말하면 봄이 멈”추냐고 묻는다. 내내 담담하고 나직하게 독백을 읊조리던 시인은 이제 목소리에 힘을 실어 세상을 향해 질문한다. “가장 간절하게 뜨거운” 새싹 돋는 자리에 피어나는 수선화더러 “그만 노랗게 피라고/말할 수 있”냐고. 노란색이 다 피어나기까지 하염없이 짧기만 한 봄이라서 시인의 마음은 더욱 초조하다. 노란색이 머금은 비통한 슬픔과 눈물의 함의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이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둘러 노란 리본을 다는 시인의 모습은 사뭇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다. 시인은 안다. 시간이 지나도 이 일만큼은 ‘그만’할 수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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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면 됐다

그만하자는 말

봄이 왔는데 온 봄에게 그만하자

그만하면 됐다고 말하면

봄이 멈춥니까

새싹 돋는 자리는

가장 간절하게 뜨거운 곳

노란 수선화에게

그만 노랗게 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노란색이 다 피기까지

봄이 하염없이 짧기만 합니다

부끄러운 얼굴로

노란 리본을 달았습니다

노란색이 벼랑처럼 가파릅니다

―「그만이라는 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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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살아가기에는 외롭고 고단한 세상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시인의 따스한 시선은 시 곳곳에서 묻어난다. 조미희의 시편이 시종 추위와 가난과 슬픔을 이야기함에도 마냥 춥지도 비참하지도 암울하지도 않은 까닭은 시인 본인이 같은 문제를 앓고 있는 타인들을 오롯이 보듬어 안기 때문이다. “함께 흐느낀다는 것은 따뜻한 이불 같다”(「십이월」)고 말하며 “얼룩도 꽃이 되기를”(「지우개를 사용하세요」) 소망하는 시인의 품은 넉넉하고 아늑하다. 그러하기에 ‘오지’에서의 치열한 분투도 감내할 수 있고, 아득한 ‘달나라’를 향한 위태로운 줄타기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이기에.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그리운 무중력-발렌티나 테레시코바에게
십이월
광대의 뒷면
쉬기 좋은 방은 어느 계절에 있지
호박에 관한 명상
오지로의 입문
병동
물고기의 등엔 가시가 있다
노량진, 노량진
그림자의 집
폭暴의 시간
올림머리 증후군
바닐라 스카이
카운트다운
잠자리

2부
버렸던 귀 찾아오기
이상한 교실
담장, 장미 그리고 담배
벽과 등 사이에서
신과 전당포는 너무 높은 곳에 있다
지우개를 사용하세요
독이라는 이름의 독채
그림일기
귀만 자라는 남자
어떤 노래는 누군가를 데려오고
정박
달을 갉아먹는 집
빨간 거짓말을 사랑했네
맷집
그게 그거였어
철심의 유효기간

3부
눈물의 태도
고전
해변
나무는 나무를 부르고
그만이라는 말
민들레 착륙기
나는 밤 고양이라오
정월의 16일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서 쌀쌀쌀
어제의 약속
소녀였을 때
당신이 없다
조언들은 다 죽었다
봄, 짧은 낮잠
놀라운 신전

4부
토끼 발자국으로 숲의 불이 켜질 때
동화의 딜레마
앞발을 핥는 담장
거기에 구름과 고양이가 있다
보라의 사육제
장롱
우물
꽃들이 펄펄 끓고
여름의 안쪽
환상상회
집이라는 역사
버블 욕조
비를 소비하는 감정
중력의 밑변

해설 | 맹문재(문학평론가․ 안양대학교 교수)
난쟁이의 달나라

작가

조미희 지음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5년 『시인수첩』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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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1. 김미정
    2020년 12월 28일 12:55

    조미희 선생님
    보라색 자칭씨가 궁금합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오지의 그곳은 또한 어떤 삶일지
    성큼 성큼 들어가고 싶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