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구름이었다

방수진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9년 8월 16일 | ISBN 9788983927538

사양 124x198 · 144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26 | 분야 시집

책소개

구름에 실린 내밀하고 풍부한 감정들의 서사

빈 오선지에 울음을 그려 넣는 시인 방수진의 첫 번째 시집

 

우리는 모두 한때 ‘무엇’이었다. “구름이었다가 비였다가 문이었다가 벽이었다가 선이었다가 점이었다가 너였다가 나였다가”(「시인의 말」 중에서), 결국 또 다른 무엇이 된다. 시간과 바람에 풍화되는 존재인 우리는 영영히 고정된 무엇으로 남을 수 없어 자꾸만 다른 무엇이 되어 간다. 그 변모 과정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으나, 분명 우리는 그렇게 변해 간다. 몸을 뒤채며 무엇에서 무엇으로 바뀌어 가는 존재의 변이를 포착한 시인이 있다. 200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문단에 나온 방수진 시인이다. “시적 대상을 장악하는 힘이 뛰어나”(이문재)다는 평을 받으며 시 「창고大개방」으로 등단한 그녀는 당선 소감에서 “세상 모든 곪아 터져 가는 것들을 가슴에 품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드러낸 바 있다.

방수진 시인을 부르는 말은 여럿이 있다. 누구는 그녀를 ‘중국 읽어 주는 시인’으로 부른다.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중국 상하이 화둥사범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중국어를 가르치고 중국 문학을 번역하는 일을 해 온 ‘중국통’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EBS <세계테마기행> 중국 음식 기행 큐레이터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그녀를 뮤지컬 공연까지 한 연극배우로, 어떤 이들은 문학과 음악의 콜라보레이션을 시도한 시인&뮤지션 통섭 융합 프로젝트 밴드 ‘시인의 정원’의 리더로 기억하기도 한다.

‘시인의 정원’ 밴드 활동을 통해 그녀는 ‘시’가 ‘노래’가 되고 ‘이야기’가 되어 흘러가게 하는 일의 새로운 시발점을 마련하기도 하였고, 중국 유학 시절과 여행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낀 이국의 문화와 사람들에 대한 사연들을 기사, 칼럼, 에세이 등으로 오롯이 담아내는 영역 확장도 시도하였다. 이렇게 등단 후의 10여 년을 결코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기에 그녀의 시집은 풍부한 ‘서사’를 담은 책으로 어엿이 태어날 수 있었다. 기자로, 카피라이터로, 뮤지션으로, 그리고 1인 크리에이터로 종횡무진 활동해 온 방수진 시인. 더욱이 그녀는 자신의 취미가 ‘달리기’, 특기가 ‘중국어와 일본어로 지하철 안내 방송 멘트하기’라고 말한다. 숨길 수 없는 끼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녀의 시집 역시 마찬가지다.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여문 시어들이 알알이 들어찬 이 책은 시인의 첫 시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성긴 구석을 도무지 찾기 어렵다. 등단 이후 10년이 넘도록 시의 집을 설계하고 내실을 채우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녀는 개개의 시에 저마다의 목소리를 입히기 위해 온 감각을 열고 시 너머의 영역으로 성큼 나아갔다. “한때 구름이었던” 그녀는 시집을 통해 이제 또 무엇이 되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농밀한 상처를 울음으로 치환하는 시인

 

그녀는 때로는 위아래로, 때로는 좌우로, 때로는 비스듬하게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해 가는 뭇 존재의 움직임을 따라 시적 구름을 띄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시는 고여 있지 않다.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처럼 삶의 기저에 흐르는 정서를 가르며 부드럽게 유영한다. 시인이 띄운 구름 속에는 온갖 감정이 응집되어 있다. 기쁨과 슬픔 따위의 상투적인 단어만으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밀도 깊은 감정이다. 아마도 그 감정은 “세상 모든 곪아 터져 가는 것”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시인은 그 감정들을 그러모아 ‘울음’으로 치환한다. 그녀에게 시를 쓰는 일은 곧 ‘상처 입은 것들’이 내는 울음을 오선지에 빼곡히 그려 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좌절하고, 언제나 불안하잖아요. 다칠 걸 알면서도 뛰어들고, 힘들 걸 알면서도 부딪히고, 마음을 다해서 실패하고 상처를 또 끌어안고……. 하지만 저는 그 상처를 외면하거나 아름답게 꾸미거나 하지 않고, 그것들이 내는 ‘울음’에 진솔하게 귀 기울이고 싶었어요. 저에게 시를 쓰는 일은, 그 ‘울음’을 빼곡하게 오선지에 그려 넣는 일과 같아요. 저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상처의 방정식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일,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이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일.”

―『시인수첩』, 2019년 여름호, ‘시인 대 시인’ 인터뷰 부분

 

이 시집의 해설을 맡은 허희 평론가는 방수진 시인을 일컬어 ‘육체의 현상학자’라고 정의했다. 그만큼 “허황된 말을 남용하지 않는다는 의미”(해설 「실버 라이닝 포에트리(Silver lining poetry)」)다. 과연 시인은 언어를 낭비하지 않는다. 덕분에 그녀가 다루는 어떤 상처도 왜곡되지 않는다. 그녀는 모른 척 뭉개 버리거나 아닌 척 포장해 버리는 등의 속임수를 쓰지 않으며, 상처가 꽃이 되는 마법은 더욱이 흉내조차 내지 않는다. 상처가 내지르는 ‘울음’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오선지에 받아 적는(그리는) 시인의 정직함 덕분에 그녀의 시들은 더도 덜도 아닌 정량의 감정을 머금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그려 낸 오선지의 곡들은 지나치게 구슬프거나 유난히 들떠 있지 않다. 다만 나직이 다독일 뿐이다. 당신처럼 나도 그러하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우리는 고목나무처럼 나란히 누워

서로의 마른 살갗을 가만히

매만져 주곤 했었다 마치,

이것 말고는 기억나는 일이 없다는 듯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이

서로의 손끝에서 툭툭 떨어지는 살갗을 바라보며

낄낄대며 웃었다

 

들러붙은 웃음들로 벽지가 눅눅해졌다

마주한 어깨가 쉼 없이 녹아내렸다

자주 너는 등을 한껏 웅크린 채

아무리 불을 끄고 눈을 감아도

쉽사리 어두워지지 않는 밤에 대해 중얼거렸다

그럴 때면 가 본 적 없는 알래스카의 자정을 떠올린다 했었지

 

그곳에선, 한 번 감았다 뜨는 별들의 눈동자만으로도

이생의 기억이 제 온도를 찾아 퍼덕이고

눈이 쌓이는 소리를 조용히 배웅하는 마음만으로도

일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었지

매일 알래스카를 떠났다 돌아오는 네 발걸음이

내 심장 위를 도장 찍듯 새기던 날들,

 

하루는 네가 떠나 버리고

저물지 않는 너의 밤에

커튼을 치러 들렀을 때 보았다

 

네 상처의 낱장이

둥둥 떠다니는 큰 물방울이 되어

침대를 적시고

바닥을 채우고

지구 정반대편의,

어쩌면 애초부터 나에겐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을지 모르는

너의 세계를 한없이 적시고 있는 모습을

젖을 대로 젖어 축 늘어진 감정의 테이프가

일생을 거쳐 말라 가는 모습을

―「알래스카의 밤」 전문

 

 

시선과 함께 몸을 움직이는 시인

 

“비의 잠재성이자 가능성”(해설 「실버 라이닝 포에트리(Silver lining poetry)」)인 구름은 언제든 지상으로 쏟아져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방수진의 시적 구름 역시 그러하다. 무수한 감정이 응집된 그녀의 구름은 상하좌우로 또는 대각선으로 옮겨 다니며 읽는 이의 내면으로 불시에 쏟아져 내릴 잠재성과 가능성을 품고 있다. 시인은 하늘을 유영하는 구름처럼 시선과 더불어 몸을 움직여 깊이를 창안하고, 넓이를 고안하며, 입체를 형성함으로써 시의 경계를 확장시킨다.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며 위아래를 오가도(「창고大개방」 등) 어지럼증이 일지 않고, 대륙을 떠돌며 멀리 더 멀리 나아가도(「흩어지는 몸, 실크로드」 등) 고단하지 않고, 당신과 나 사이 도무지 메워지지 않는 공백을 가로질러 가도(「도넛 이론」 등) 멀미가 나지 않는 것은 시인이 그저 대상에 시선을 드리우는 데에 그치지 않고 ‘몸소’ 움직이기 때문이다.

 

강제로 살을 파고든 적 없었다

벌레는 살갗이 무르고 터질 때까지

시간의 뒤만 쫓을 뿐

 

벌레의 통로는 부드러웠다

몸뚱이가 스쳐 간 곳은 모두 상처였으나

아프지 않았다

그 누구의 방이든 제 몸 집어넣는 것이

나오기보다 어렵다는 걸,

뱃가죽 몇 번 찢기고서야 알았다

 

사과는 시간이 지나면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든다 서서히 열리는 부드러운 통로들, 힘줄을 사뿐히 넘고 통로의 밑바닥을 삭삭 긁으며 전진하는 벌레들, 부드러운 흔적들이 달콤하다

―「부드러운 통로」 부분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시인은 대상 속에 “강제로” 침투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는 ‘흔적’을 쫓아갈 뿐이다. 상하좌우 그리고 대각선으로 이동하며 상처의 흔적을 더듬는 여정임에도 “아프지 않”은 까닭은 그 통로가 부드러울뿐더러 심지어는 “달콤”해서다. 어쩌면 시인은 그 통로에서 빛을 감지하지 않았을까. 상처 입은 과육에도 “힘줄”이 있다는 걸 발견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시인이 이 시집에 띄운 구름 역시 빛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구름을 감싸는 따스한 빛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런 당신에게라면 마지막으로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방수진의 구름에서 반짝거리는 걸 살펴보라는 조언이다. 그녀의 구름에는 실버 라이닝―구름의 가장자리에서 퍼져 나오는 한 줄기 빛이 있다. “구름 뒤에는 항상 빛이 있어요. 인생에서 빛을 찾으세요.”(<Look for the silver lining>) 쳇 베이커(Chet baker)가 부르기도 한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방수진의 시집을 손에 들었고, 주로 대각선적인 것에서 그녀 구름의 실버 라이닝을 찾아냈다. 이 시집에 없는 밝음을 진짜 본 것인 양 거짓말한 게 아니다. 이것 없이는 여정을 시작조차 못했을 테니까. 실버 라이닝을 품은 구름이 오늘도 우리 머리 위를 지난다.

―해설, 「실버 라이닝 포에트리(Silver lining poetry)」 부분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雨연히
폭우
ㄱ의 감정
무인반납기
도넛 이론
개기일식
너를 믿어 본다는 것
당신이 멀다
불면
미발화(發話)시점
수취인불명
인정-L에게
물고기자리
알래스카의 밤

2부
자라나는 소년들
자라나는 소년들 2-모르는 사람
자라나는 소년들 3-이방의 목소리
네이멍구, 기록수첩
흩어지는 몸, 실크로드
아마존 일기
낮아지는 골목-베이징, 후퉁이라 불리는 작은 거리에서
금(禁)성
어떤 불시착
화성으로부터, 여자
패스포트

3부
낙엽을 버티는 힘
창고大개방
부드러운 통로
이등분을 위하여
포도알 기록서
오징어 살인 사건-메트로 PC방
보도블록, 미완성 3악장
허바허바 사진관의 이력
그날들

4부
A병동 326호
허공사용설명서
몽유
꽃피는 중환자실
가로등
아이의 방식
심야버스
귓불
오래된 탄생
무너지는 진화
영영
대기만星

해설 | 허희(문학평론가)
실버 라이닝 포에트리(Silver lining poetry)

작가

방수진 지음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 문학을, 중국 상하이 화둥사범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중국 문학을 전공했다. 2007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고, 이후 기자와 카피라이터로 활동하며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필력을 쌓았다. 중국 문학 작품을 번역함과 동시에 중국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1인 크리에이터의 삶을 살고 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큐레이터로 참여해 중국 문화를 소개한 바 있다. 현재 카카오브런치에서 ‘시인의 정원’이라는 필명으로 다양한 칼럼과 에세이를 연재 중이며, 옮긴 책으로 에세이 『자주 흔들리는 당신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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