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의 세계

김두안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9년 9월 10일 | ISBN 9788983927545

사양 124x198 · 152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27 | 분야 시집

책소개

불면의 밤에 그려 낸 ()의 풍경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김두안의 두 번째 시집

 

그가 “안녕(Goodbye)”을 고한다. 10년 만에 60편의 시를 들고 돌아온 시인 김두안이 건네는 인사다. 그가 애써 건넨 “안녕”은 다름 아닌 작별의 인사다. 떠나보내야 할 것들을 그러모아 한 권의 시집으로 엮은 그는 “내가 쓴 詩들에게”(‘시인의 말’ 중에서) 작별 인사를 건넨다. 색채와 공기, 말과 기억, 사연과 사물 등이 뒤엉켜 있는 뭇 詩들에게. 어쩌면 이 시집이 무려 ‘10년 만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오래도록 준비한 ‘작별 연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짧은 한 마디 “안녕”을 발음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밤을 불면에 뒤척이며 보냈을지, 섣불리 헤아릴 수조차 없다. 다만 10년의 공백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겠다. 분명 그의 세계에 숱한 변화가 일었으리라는 것.

2006년 『한국일보』로 등단해 “바람이 이”(함민복)는 시편들로 강렬한 서정을 선보인 바 있는 김두안 시인의 세계는 과연 10년 사이 사뭇 변했다. 2009년 상재한 시집 『달의 아가미』가 “한 번 호흡하면 잊을 수 없는 강렬함이 배어 있”(『달의 아가미』 소개문)는 시집이라면, 이번 시집 『물론의 세계』는 “예민한 감정의 파동이 얼어붙은 강물에 봄의 입김을 불어넣는”(해설 「유령의 감각」) 시집이다. 과연 이번 시집 『물론의 세계』에는 시각과 청각을 압도하는 감각적인 이미지로 “예민한 감정의 파동”을 일으키는 60편의 시들이 자리해 있다.

그의 시 세계 저변에는 시청각 이미지를 평면에 옮겨 내는 미술적 감각도 한몫하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력이지만, 민족미술인협회 회원으로 수차례 그룹전에 참여했던 그는 세계 최초로 갯벌을 재료로 한 ‘갯벌 판화전’을 개최한 미술 작가이기도 하다. 고향이 전남 신안인 시인은 갯벌에 색을 입혀 단 한 판밖에 찍지 못하는 갯벌 판화 작업을 하면서 “내 마음도 항상 자연을 닮은 잿빛이길 바라고 있고 나에게는 갯벌과 그 색감은 나의 문학적 색감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시집의 표지 색도 갯벌에 가깝다.

김두안 시인이 펼쳐 내는 무채색 세계는 잠 못 드는 밤, 절제된 슬픔의 언어로 빚은 세계이다. 시집 페이지를 들춰 아무 시편이나 읽어 보라. 그 시가 어떤 시이든 시집을 펼쳐 든 당신을 “빗물에 젖는” “기억”들을 매만지면서도 “난 괜찮아요”(「물론의 세계」)라고 속삭이는 『물론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기꺼이 안녕을 말할 수 있을 때

 

가끔 뱀은 허물을 벗고 꽃이 되지

꽃은 눈이 많아 눈물 속에 살지

내가 안녕! 안녕!

꽃을 부르면

참 할 말이 많았는데……

꽃은 뒤돌아보다 슬픔까지 걸어가지

두 갈래 혀로 눈을 만지는

꽃들아! 말해 줘

입술을 깨물고 별이 되는 꽃들아! 말해 줘

난 아직 어른이니까

눈가에 흐르는

안녕을

어떻게 닦아 내는지 말해 줘!

―「꽃들아! 말해 줘」 전문

 

꽃이 된 뱀이 “두 갈래 혀로 눈을 만”진다. 눈물이 흘러서다. “눈이 많아 눈물 속에” 사는 꽃이 된 까닭에 ‘한때 뱀이었던 꽃은’ 갈라진 혀로 눈을 만지며 “슬픔까지 걸어”간다. 꽃이 된 뱀이 슬픔까지 걸어가 “입술을 깨물고 별이” 될 것을 알기에 시인의 눈가에는 하염없이 “안녕”이 흐른다. 할 말을 가득 품은 채 몇 번이고 “안녕! 안녕!” 불러 보지만 꽃은 “뒤돌아보다” 이내 다시 걸어갈 뿐이다. 시인은 부탁한다. 말해 달라고, 눈가에 흐르는 “안녕을/어떻게 닦아 내는지” 가르쳐 달라고. “아직 어른”(또는 고작 어른)일 뿐인 시인은 “안녕”을 닦아 내는 법을 몰라 꽃에게 답을 구한다. 저 스스로 슬픔으로 걸어가 입술을 깨물어 별이 될 수 있는 꽃이라면 응당 답을 알고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인의 시에서는 마법이 일어난다. 뱀이 꽃이 되고, 꽃이 별이 되는 마법. 구불구불하고 가만가만한, 그러나 그 속에 치명적인 독을 품은 한 마리 뱀이 눈물을 머금은 한 송이 꽃으로, 종내에는 반짝이는 별로 변이할 갈 때 시인의 내면에도 변화가 인다. 눈가에 흐르는 “안녕”을 닦고 기꺼이 “안녕”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시집 면면에는 그러한 시인의 내적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죽음에 대한 리허설」을 보자. “나를 쏘아 올려” 우주(또는 죽음)에 닿았던 한 자아의 고백이다. “두려움”을 “유일한 통로” 삼아 통과한 태양 너머, “드디어 안녕”이라 말하며 “오직 어둠을 향해 날아”간 그는 “허허롭고 쓸쓸한 회색 공간”을 본다. “갈수록 암담하게 짙어지”는 우주 속에서 “침묵의 무덤 앞에 부딪히”고 만 시인은 “어떤 영혼도 통과할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의 벽” 앞에 서서 “두려움”을 마주한다.

 

나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어

우린 하나랄까

분열된 선택은 숫자에 불과했어

 

죽음의 문이 열리면 시간은 빛이 되지 나는 이제 어둠

이니까

우주여 안녕?

나는 다시 연둣빛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어

―「죽음에 대한 리허설」 부분

 

두려움을 마주한 자아의 ‘결국’은 무엇인가? 어둠과의 결합, 곧 스며듦이다. “죽음의 문이 열리”고 “빛”이 된 “시간” 속에서 자아는 “이제 어둠”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어둠이 된 존재가 건네는 “우주여 안녕?” 인사 끝에 그는 비로소 “다시 연둣빛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드디어 안녕”(Goodbye)을 말하며 작별을 고한 뒤, “우주여 안녕?”(Hello) 인사를 건네는 순간, 마침내는 “연둣빛 감정”이 묻어나는 “안녕”(Welfare)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기꺼이 “안녕”(安寧)을 말할 수 있게 된 시적 자아의 단단한 내면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끊임없이 자라나는 죽음의 생명력과 음악

 

죽음이 묻은 자리에는 반드시 무엇이 깃든다.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일까. “죽은 나무의 입속에서/안개가 피어나고 푸른빛들이 흘러나오”(「피아노 숲」)며, “죽은 나무 손가락에 달이 열”(「유리컵 속의 달」)린다. 그뿐이 아니다. “죽은 오동나무 속에서/음악의 손가락이 쏟아”(「악몽」)지거나, “외로움이 죽어서 음악을 찾아”(「물론의 세계」)오기도 한다. 죽음은 죽어서도 끝이 나지 않는다. 하물며 머리카락은 “죽어서도 자라겠다고,/머리 끈에 한 다발 묶여 있”(「혈여(血餘)」)으니 죽음의 생명력이 얼마나 질기고 강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일까? “죽은 사람의 이름이 밀려오는/밤이면 새들은 꽃을 먹지 않”(「새들이 돌아오는 저녁」)으며, “새들이/죽은 버드나무 위에/집을 짓지 않”(「바람이 다시 쓰는 겨울」)는다.

그러나 죽음의 생명력은 도리어 ‘생의 의지’를 표상한다. 죽음이 묻은 자리에 무엇이 깃드는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특히 김두안의 시에서 ‘죽음’과 ‘음악’의 상관관계는 매우 깊다. “음악의 손가락이 쏟아”지는 “죽은 오동나무” 그리고 죽어서 “음악을 찾아”온 “외로움”은 그의 시작(詩作)이 음악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몇몇 시에서 드러나듯 “피아노”라는 악기는 그의 시에서 상징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내가 아는 남자는 피아노를 아내라고 불렀다

그는 아픈 피아노를 배에 싣고 유배를 떠났다

 

가문비나무가 울창한

호수 안의 섬에서

죽은 피아노의 장례를 치르고 수면을 연주했다

 

그가 깨운 흰 건반의 물결이

가문비나무 숲속에 번져 갔다

호수의 깊고 암울한 울음이 까마귀 떼를 날려 보냈다

 

그가 익사한 날, 안개 속에서

달이 떠올랐다 몸속의

소리를 다 비우고 나서야 빛이 되는 생이 있다

―「피아노 숲」 부분

 

흔히 죽음을 빛깔이나 냄새로 표현하는 것과 달리 그는 청각적 장치로서 시 행간에 음률을 새겨 어딘가 고독하고 쓸쓸한 음악을 귓가에 들려준다. 이경수 평론가는 “피아노를 비롯한 음악은 김두안의 시에서 감정의 파동을 전달하는 데 기여한다”며 “음악은 아프고 불안하고 외롭고 우울한 소리 이미지와 함께 어둡고 음울한 죽음의 소리 풍경을 완성하는 데 기여한다”고(해설 「유령의 감각」)고 평했다. 그의 시에서 ‘음악’은 시집 전체를 ‘환(幻)’의 공간으로 구축해 내는 데 큰 몫을 한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공간 속에서 시인은 “시의 주체를 홀리기도 하고 잊고 있던 기억과 대면하게 하기도 한다”(이경수). 시인에게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떠나보내야 할 것들에게 지난 10년간 차마 건네지 못했던 “안녕”(Goodbye)을 기꺼이 말하기 위해. 그리하여 비로소 “안녕”(Welfare)하기 위해.

 

죽음의 검은색으로 출렁대는 이번 시집에서 유령의 감각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첫 시집을 내고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김두안 시의 주체를 사로잡았을 개인적 죽음과 사회적 죽음이 이번 시집에 드리워진 지독한 우울의 원인이라고 짐작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 저 지독한 죽음과 유령의 시간을 지나, 불가능한 애도의 시간을 지나, 어쩌면 시의 주체도 어둠의 심연으로부터 다시 쓰는 일을 시작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음악으로 연주되는 예민한 감정의 파동이 얼어붙은 강물에 봄의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록 불안하고 우울한 입김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해설, 「유령의 감각」 부분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행성들
독백 영화관
수영약국
혼자 사는 엄마
내가 태어나는 이상한 비밀
피아노 유령
환월(幻月)
사과 나라
결(結)
죽음에 대한 리허설
피아노 숲
이상주의자
인터뷰
빙어
열대어
불면증
화요일의 감정
칼의 진술
300
검은 사람

2부
유리벽
봄, 봄
빗방울 전주곡
토요일의 성분
엘리베이터
포크와 나이프
창문과 여섯 개의 달
악몽
살화(煞花)
불길한 집
창문은 기록한다
환생
혈여(血餘)
비의 숲
화려한 무늬
집착
빈 화분
유리컵 속의 달
해무
꽃들아! 말해 줘

3부
가상현실
내부로부터 동백
사과를 잊지 말아요
물론의 세계
이 세상을 떠난 음악들
우리는 구체적일 수 없는 얼굴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
바람이 다시 쓰는 겨울
마지막 동작
오월, 편지
속눈썹을 믿지 마라
관성의 법칙
모자에 대한 진술
날아가는 자장면-주재환 화가에게
4번 타자
안타에게
조도(照度)
너무나, 쉽게
해당화
임자도

해설 | 이경수(문학평론가‧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유령의 감각

작가

김두안 지음

1965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다.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달의 아가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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