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최은묵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9년 12월 13일 | ISBN 9788983927842

사양 124x198 · 160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30 | 분야 시집

책소개

아날로그 시인 최은묵이

기생충의 한국 사회에 던지는 키워드는 바닥

 

모든 존재는 바닥을 딛고 살아간다. 날개 달린 생명체들도 시시로 바닥에 깃든다. 바닥은 존재를 지지하는 지면인 동시에 지상과 지하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기도 하다. 곧 ‘바닥’은 또 다른 세계가 연결된 ‘문’인 셈이다. 그 문을 여는 열쇠, 즉 ‘키워드’를 제시한 이가 있다. ‘바닥’을 읽는 시인. “읽어야 할 바닥”이 많은 까닭에 끊임없이 “바퀴”(「쉬어 가는 페이지」)를 굴리며 시의 길을 걸어가는 시인. 바로 최은묵이다. 그가 밟고 선 땅, “바닥의 문장”을 읽기 위해 그는 눕는다. “바닥의 문장은 발바닥이 아니라 등으로 읽어야”(『시인수첩』 2019 겨울호, 「詩사회」 ‘시론 에세이’ 중에서) 하기 때문이다. “누워야만 들리는”(「땅의 문」, 『괜찮아』) 바닥의 소리를, 문장을 듣고 읽어 냄으로써 그는 지상과 지하(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키워드’를 밝혀낸다.

2007년 『월간문학』과 201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2014년 첫 시집 『괜찮아』를 상재하기도 전에 2008년 제9회 <수주문학상> 대상, 2012년 제4회 <천강문학상> 대상, 2013년 제4회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했다. “삶의 신산함을 아프게 노래하면서도 깊이 있는 사유를 서정 속에 녹여 놓고 있”(이성혁)는 그이기에 “우리 시단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오는 미지의 전사”(홍일표)라는 수식어를 얻기까지 했다. “터진 신발 밑창에서 땅과 연결된 문을 발견”(「땅의 문」, 『괜찮아』)한 이후로 지상과 지하를 잇는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는 그가 열어 보이는 바닥 너머의 세계. 『괜찮아』 이후 5년 사이 “시어의 상징성을 크게 높이고” “단속(斷續)적인 몽타주를 활용하는”(해설, 「지하의 존재들을 건져 내기」) 등 다소 변모한 그의 시 세계를 『키워드』를 통해 엿보기 바란다.

 

 

체온전송한다는 것

 

0과 1로 모든 현상을 표현하는 시대. “눈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디지털의 시대에도 여전히 아날로그의 심장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이가 있다. 그는 디지털 문법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모든 질문에 아날로그로 대답”한다.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함으로써 그에 따르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다. 태생이 “모노타입”이라고 밝힌 시인은 “점심을 굶고 구입한 건전지 두 개로는 뇌를 작동할 수 없어” 수시로 “태엽을 감”는다. “0과 1이 두려”워서라고 고백했지만 실상은 “체온”을 잃고 싶지 않아서다.

 

나는 모노타입의 유전자로 태어났다

 

왜곡된 데이터는 톱니바퀴에 낀 녹 때문이다 태엽은 풀렸고 노이즈는 발생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전원을 끄고 잠든 당신의 숨소리는 연속적 신호다 오류에 둔감한 나는 시곗바늘처럼 겉에서 적당히 돈다

 

디지털은 눈물이 없다

눈물은 아날로그의 오류

 

좌표를 지운 섬에서 살았다

0과 1이 두려워 세상의 모든 질문에 아날로그로 대답했다

 

점심을 굶고 구입한 건전지 두 개로는 뇌를 작동할 수 없어

지금 얻은 데이터는 불편하다

 

초기화는 배우지 못한 기술이다

덮어쓸 수 없으니 밀어내기로 한다

디지털의 위장을 지닌 당신에게 아날로그로 체온을 전송했다

상처를 노이즈로 읽는 건 오해다

다시 태엽을 감은 이유는 가슴 때문이다 내 유전자는 여전히 모노타입이다

―「아날로그의 뇌」 전문

 

체온을 잃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시인은 “디지털의 위장을 지닌” 이들에게 “아날로그로 체온을 전송”한다. 제아무리 디지털의 위장을 장착했을지라도 일정 수준의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면 서서히 시들어 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체온을 전송하는 방식은 역시 아날로그적이다. 바로 ‘시’에 체온을 실어 ‘전송’하는 것. “아날로그의 뇌”로 써 내려갔기에 그의 시에는 깊고 짙은 사유와 서정이 묻어난다. 은은한 온기가 실린 시어들은 읽는 이의 가슴을 데울 뿐만 아니라 잠긴 ‘바닥’ 문을 여는 열쇠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떠나지 못한 자의 피부”와도 같은 “죽은 우물”을 해독하는 열쇠로.

 

시는 디지털적인 계산적 두뇌로는 써질 수 없는 것, 체온을 가진 가슴을 통해서라야 쓸 수 있다. 체온은 생명이 지속되고 있는 것을 나타내며, 숨처럼 연속적인 신호, 즉 아날로그적인 신호다. 그래서 “체온을 전송”하는 시는 아날로그 매체인 것이다. 이 아날로그적인 시를 당신에게 전송하는 일이란 디지털적인 사고에 의해 점령당한 현대인에게 삶의 고유성과 연속성을 전송하는 일이다. 최은묵 시인은 현대의 반생명성에 맞서서 삶의 체온과 고유성을 지키고, 그것들을 타인 나아가 “모던 타임즈”에 퍼뜨리고자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해설, 「지하의 존재들을 건져 내기」 부분

 

 

새로 돋고 있계단을 향하여

 

바닥 너머에는 죽은 자만 묻혀 있는 것이 아니다. 지상 아래 지하에는 1년 365일 노동하며 근근이 목숨을 연명하는 일개미들의 터전, 이른바 “개미굴”이 자리한다. 지상 위에서는 ‘감히’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은 “숙련된 몬스터”다. 그들은 “서둘러 분장을 하”는 바쁜 아침에도 “더듬이를 숙여/먼저 죽은 계급에게/다 같이 묵념”하는 애도 의식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들 몬스터 집단이 읊조리는 이 한 편의 시는 마치 ‘노동요’처럼 애달프기까지 하다.

 

 

개미굴의 아침은 등 굽은 수드라처럼 쉬 펴지지 않지 직립보행을 꿈꾸던 일개미들이 기지개를 켜네

 

우리는 숙련된 몬스터

구부러진 일탈은 잠자리에 남겨 두고

서둘러 분장을 하지

 

더듬이를 숙여

먼저 죽은 계급에게

다 같이 묵념

 

정시에 시작되는 비포장 쇼타임에 손님을 모아야 해

굴 밖 늙은 허리에게 눈길을 주는 건 규칙 위반

팔등에 찍힌 바코드로 벌점을 입력하고

 

고객님 안녕하세요

 

셔터가 열리면 두 발로 걸으려던 모의는 어긋나지

좌표 잃은 더듬이를 유니폼으로 가린 채 부은 다리를 주무르는 동안

우리가 밤마다 등을 맞대고 상상하던 콜키스는

조각난 뉴스를 짜 맞추듯 제멋대로 변신하지

―「황금배열 몬스터」 전문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개미굴에서 몸을 구부린 채 쪽잠을 자고 일어나 서둘러 분장을 하고 집을 나서는 고단한 일개미들의 자화상이 선연하게 그려졌다. “두 발로 걸으려던 모의”조차 번번이 실패한 채 다만 “부은 다리를 주무”를 뿐이다. 지켜 낼 수 있는 존엄성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서글픈 몬스터들. 시인은 그런 지하의 존재들에게 시선을 드리운다. “헛디딘 것이 페달뿐이”(「충규」) 아닌 인생들을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는 것이다. 이들을 구원할 ‘출구’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 시인은 그 암담한 현실에 맞서 “비상구를 주문”(「다행이다」)한다. “다른 삶으로 탈출”(해설, 「지하의 존재들을 건져 내기」)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새 희망을 발견한다. 저기, “그늘을 화장으로 덧씌우지 않아도 좋은 당신의 계절을 향해/계단이 새로 돋고 있”(「다행이다」)기에.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2초의 오류
지다
새치기의 달인
잠 못 드는 밤
키워드

악수
맛없는 독방
세미누드
라면찌개김치사리
종점, output
치킨게임
누나, 위험해요
늙은 처녀
어떤 동물의 코를 이식하셨습니까

2부
아픈 사람들
진통제
5분 전
공평한 식사
땅콩집
리포트
붐비는 농담

출장 중
폐역에서 백조를 기다리는 동안
47을 열다
키싱마크
우리는 잠을 안 자
생일
히든카드
한천

3부
악몽
미란다원칙
공작
태양의 눈물
대주주
화이트데이
모던 타임즈
아날로그의 뇌
미소분식
쉬어 가는 페이지
나비―가정법원, 남자의 진술
크롤
바보
육각등불
기압골의 영향으로

4부
술래; 줌아웃
외박, 시월이십사일
패러디
차라리 홍길동
이 시는 거꾸로 읽어야 한다
황금배열 몬스터
머리 쓰지 마
눕다
듀스
검은 건반
독감
숨은그림찾기
불완전 변태
충규
다행이다

해설 | 이성혁(문학평론가)
지하의 존재들을 건져 내기

작가

최은묵 지음

2007년 『월간문학』과 201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수주문학상> <천강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괜찮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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