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우리에게

김민철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20년 2월 24일 | ISBN 9788983928023

사양 124x198 · 124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32 | 분야 시집

책소개

생의 물결을 타고 유영하는 김민철의 첫 시집

순간의 몰두로 그려 낸 우아하고 섬세한 풍경화

 

시인 김민철. 그의 첫 시집을 소개하기에 앞서 솔직해지기로 한다. 그는 문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거나 왕성하게 작품 발표를 하는 그런 시인은 아니다. 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으로 아등바등 생계를 책임지는 우리의 흔한 이웃이면서도 시 쓰는 일을 부질없다 하지 않고, 유일한 자기 안식과 구명으로 여기는 순결한 시인이다. 누군가는 그를, 세상의 부름 없이도 오직 자신의 시세계를 개척하고 구축하는 독고다이의 시인이라고 부른다. 시인은 본류와 유행에서 한걸음 벗어나 있으면서도 삶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유지하고, 삶의 안과 바깥을 살피며 자기의 시 안에서 심리적 변경의 수축과 확장을 주관하고 있다.

시 속에서 시인 김민철은 유영한다. 심해를 헤엄치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깊은 물의 압력을 뚫고 물결 따라 유유히 흘러 다니는 그의 몸짓은 짐짓 여유롭다. 더 빨리, 더 멀리 나아가고자 초조해하거나, 자신을 삼키려는 뭇 대상이 두려워 움츠러드는 일이 결코 없다. 다만 그는 천천히 그리고 잔잔히 물결을 타고 흐르며 자신에게 찾아드는 어떤 ‘순간’을 포착하는 일에 몰입할 뿐이다. 삽시간에 휘발되어 버리는 찰나의 순간들이 그에게는 시가 되고 노래가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는 우아하고 섬세하다. 그에게 다가온 ‘순간’을 가슴에 걸어 둔 채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음미하여 한 폭의 풍경을 그려 내기에 그윽하기까지 하다.

그의 등단작 「풍경 재봉사」에는 그런 그의 시적 특성이 집약되어 있다. 그가 등단한 201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본심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시인은 그의 시가 “유행과 시류에서 벗어난 점이 무엇보다 장점”이라며 “신선하고 아름답다”고 평한 바 있다. 과연 “시의 아름다움이 지향하는 자리, 시적 사유가 머물러야 하는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해설, 「순간과 몰두의 시」)하는 그이기에 두리번거리거나 곁눈질하지 않고 심해를 유유히 흘러 다니며 신선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을 그려 낼 수 있는 것이다. “추억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다”(‘시인의 말’)는 사실을 믿는 그로서는 자신에게 안겨 온 의미 있는 순간들을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해 시를 쓰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언젠가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지 모를 ‘순간’의 풍경들. 그 속으로 들어가 시에 아로새겨진 ‘삶결’을 따라 천천히 유영해 보자.

 

 

지상의 모든움직임을 포착하는 시인

 

꽃비 내리는 어느 봄,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존재들은 저마다 포즈를 취한다. 각 존재에게 지는 꽃잎의 의미가 하나같이 꼭 같을 수는 없을 터. 자신의 마음에 다가와 닿는 꽃잎의 의미를 따라 각기 다른 표정과 몸짓을 드러낸다. “꽃비 MRI”가 작동하는 동안만큼은 그 누구나 투명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하염없이 내리는 꽃비가 “웃음과 헛웃음의 농도”를 포착하고, “시베리아 기단과 태평양 기단이 묶여 있는” 폐를 휘감아 돌 것이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을까. “꽃비 MRI 앞에” 서면 누구라도 “꽃잎의 수만큼 행복 지수가 높고 낮게 측정”(이상 「꽃비 MRI」)된다는 사실을 시인은 안다. 그런 그이기에 사람 앞에서 사물 앞에서 동식물 앞에서 그리고 지상의 모든 풍경 앞에서 시인은 가만히 몸을 낮추고 대상을 골똘히 바라다본다.

 

먼 길 빨리 갈 수 없어서

소라게들은 작은 텐트를 이고 다닌다

 

순천만 갈대숲

뻘이 흔들리지 않도록 거품과 구멍을 만든다

 

숲에 숨어 사는 개흙을 다루는 일이 삶을 지루하게 만들지만

 

갈대 노동자들은

가지마다 소형 라디오 하나씩 차고 다닌다

밤낮의 주변 이야기를 듣고 싶어

무심코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들은

그러나 거품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

 

―「뻘 공장에 숨은 것들」 부분

 

가만가만 조곤조곤한 존재들의 기척. 시인은 숨은 존재들의 움직임과 소리에 깃든 이야기를 꺼내어 보인다. “갯고랑이 깊고 넓어질 때마다” 하나씩 알게 되는 “뻘 공장의 비밀” 같은 것을. 굴곡진 생의 길목 틈새에 숨어 있는 크고 작은 사연들을 시에 담아 선사한다. 혼자서만 알고 있어도 그만인 이야기들이 그의 손끝을 거쳐 어엿한 시가 되는 순간, 그는 비로소 홀가분해진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사소한 사연들조차 그럴 듯한 “비밀”이 되게 하는 일. 그 생경한 “비밀”을 누설하는 일이 그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시작(詩作) 행위이기에 그렇다.

 

 

사건의 순간, 존재의 순간

 

그는 ‘시가 되어야 하는 것들’을 찾아 길을 나선다. “혼자서 시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라서, “새로운 존재들을 만나기 위해” 또는 “경험했던 것을 추상화시키기 위해 시의 어떤 곳에 거주해”(『시인수첩』 2020 봄호, 『詩사회』 중에서) 본다는 고백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시에는 특정 대상, 장소에 침투한 흔적이 엿보인다. “바위 속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미루나무”의 “가장자리 위에 앉아 연기를 내려다”(「굴뚝 많은 나무」)보거나, “외풍에 밀려온 먼지가 뒤죽박죽 앉아 있”는 “빨래 건조대”(「이사 목록에서 제외된 빨래 건조대만 남아서」)를 멀거니 바라보며 대상에 ‘몰두’한다. 시선이 닿은 대상, 그 ‘너머’를 보기 위해.

 

시인은 몰두를 통해 사물의 형상과 소리의 세계 너머까지 꿰뚫어 보려고 애쓴다. 대상에 감정을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감응으로 낯설게 하기를 개시한다. 시적 사건이 발생하도록 미지의 세계를 향해 걸어 들어간다.

―해설, 「순간과 몰두의 시」 부분

 

그는 ‘사건’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찾아 나선다. 그가 ‘시적 사건’을 발견하기 위해 지느러미를 뒤채며 물결을 가를 때 그의 내면은 우아한 파문을 일으키며 찰랑인다. 이른바 ‘사건의 순간, 존재의 순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숱한 순간들 속에 끈질기게 몰입해 끝내 새로운 의미를 길어 내는 시인. “때 묻지 않은 상상력”으로 “수압을 잘 견디면서 물의 안팎으로 자유롭게 떠다니는”(해설, 「순간과 몰두의 시」) 유유한 그의 시들이 읽는 이의 내면에도 잔잔한 생의 물결을 아로새겨 줄 것이다.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굴뚝 많은 나무
햇빛이 그늘을 넘어설 필요가 없을 때
호수의 브로치
나무도 스키니 진을 입는다
산책은 악몽을 좋아한다
홈쇼핑 콜센터
미라처럼
김홍도의 ‘빨래터’로 짜장면 배달
병아리는 젖을 물어 본 기억이 있다
고양이 목의 방울
식기 건조대에 세워 놓은 물고기
경주마의 숨
부레 단추
성에가 우는 새벽
테러리스트
호랑이 벌목공
뻘 공장에 숨은 것들
잉어 무리
산벚나무 그릇
상자들
정원 시대
시조새 연구 보고서
음의 평균화
똥개가 똥을 먹는 마음에 대한 생각
얼굴이 없는 사진
남의 집
하늘이 새를 보호한다
산부인과 병원과 요양원
총알의 처음을 생각하다
꽃비 MRI
나는 너의 증상이다
당신의 노래에 사는 것들
받침목
로또 판매점
여자 나비 화가
기내식을 대하는 방식
싱크홀
무덤을 들고 다녀요
광합성 경제학
코끼리를 만지다
교도소를 지키는 것들
백화점의 점원
용서받는다는 것
이사 목록에서 제외된 빨래 건조대만 남아서
벽은 짜증 내지 않는다
윤리는 판타지이다
매장 통지서
불사신이 자살을 했다고?
언젠가 우리에게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을 때
완벽에 대하여

해설 | 이병일(시인)
순간과 몰두의 시

작가

김민철 지음

201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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