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악기의 고백

김효선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20년 4월 20일 | ISBN 9788983928160

사양 124x198 · 176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34 | 분야 시집

책소개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꾸는 위반의 미학

김효선의 어느 악기의 고백

 

시인수첩 시인선은 연달아 제주 시인의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4·3의 아픔을 생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자연’에 녹인 정찬일의 『연애의 뒤편』에 이어, 시인수첩 시인선 서른네 번째 시집은 김효선의 『어느 악기의 고백』이다. 시인은 ‘제주’ 고유의 언어와 독특한 시적 표현으로 내밀한 세계를 그려 내고 있다. 특히 전작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가 ‘고통’이라는 시어로 타인과 세계의 존재를 바라보는 윤리를 드러냈다면, 이번 시집에서 김효선 시인은 ‘제주도’라는 세계와 분리될 수 없는 언어로 시인 자신의 삶과 연속적 관계에 있는 고유한 세계를 환기한다.

시인은 그 자신이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제주’와 분리시킬 수 없는 특유의 언어를 기호 삼아 특정 세계와의 내밀한 연속성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만드는 시적 변주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또한 예기치 않은 시간에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시인에게 도래하는 시적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더한층 적극적으로 틀에 박힌 미적 질서에서 이탈하고자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시, 그것이 발화하는 순간

 

어떤 시들이 난해한 까닭은 거기에 깃든 시인의 윤리를 타인이 100퍼센트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윤리나 인간의 내적 경험같이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하기 힘든 것,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라고 할 때, 김효선의 시는 이 명제를 여실히 증명한다. 『어느 악기의 고백』에는 시인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마음먹는 순간, 즉 시가 발화하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작품이 여럿 실려 있다.

시인은 ‘크루아상’, ‘매미’, 다육식물의 한 종류인 ‘로라’ 같은 일상적 풍경에서 포착한 순간을 특유의 언어로 그려 냄으로써 대상을 낯선 세계의 무언가처럼 보이게 하고 거기에 자신의 윤리를 투영한다. 다음의 「이치(理齒)」 같은 시는 치과 진료대에 누워 있는 화자에게 시가 도래하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라 할 법하다.

 

팬이 돌고 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한철 시달린 꿈들이

바닥에 얼음을 쏟았고

눈썹을 그리려던 펜슬은

굴러가 박살이 나 버린

오늘인데 글피의 글피를 걱정하다

아슬했던 치아가 떨어져 나갔다

 

(……)

 

살려고 발버둥 치는 세렝게티를 보며

두 다리보다 두 눈을 어디에 감춰야 할지

하마처럼 입을 크게 벌려 보세요

최대한 크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다면

 

내가 나를 다 지나간 후에

별이 빛나는 걸 걱정할까

내가 너를 다 지나간다면

발치한 슬픔이

개코원숭이처럼 돌아오지 않을까

주저앉아 버린 마음이 잇몸에서 흘러내려

아무리 방수를 해도 물이 새는 지붕

팬이 돌고 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

―「이치(理齒)」 부분

 

시 「바다유리심장」에서는 “절벽에 핀 나리꽃”을 포착한 순간이 “그릴 사람 있다 사뢰고 싶습니다”(향가 「원왕생가」의 한 구절)라는, 누군가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의 정서로 이어진다. 시 속 화자는 “너무 많은 걸 생각”해서 “나를 잃어버”린 자기 상실의 상태에서 “모서리에 기댄 밤”에 불현듯 도래하는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주웠어”라고 표현하는데,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고봉준은 이것이 시인에게 시가 발화하는 순간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제주의 언어로 그려 내는 낯선 고유의 세계

 

제주에서 태어나 성장한 시인인 만큼, 김효선의 시에는 ‘제주’와 관련된 지명이나 자연 사물이 자주 등장한다. ‘넓은 들판’을 뜻하는 ‘뱅듸’, 우도 해안의 절벽을 가리키는 ‘톨칸이’(「우도에는 저녁이 산다」), 벼랑에 위태롭게 매달려 살아가는 풀들인 ‘가막살, 피라칸다, 좀작살’(「유효 기간」), 서귀포에 위치한 마르형 분화구인 ‘하논분화구’(「하논의 시간」), ‘당신’을 뜻하는 ‘이녁’ 등은 ‘제주도’라는 고유한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언어들이다.

제주도라는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 역시 다양한 얼굴로 등장한다. 「먼 바다」라는 시에서 ‘바다’가 불투명성을 고유한 성질로 가진 대상으로 그려졌다면(“당신은 모자 안에 뭘 숨기고 있나요”), 「다시, 서귀포」에서는 리비도를 투사할 대상으로 그려진다(“한평생 푸른 바다엔 전복 소라 멍게 해삼/영원한 보물이 그리움인지도 모르고 돌아갔다지”). 이 시에서 서귀포는 “살고 싶어”지는 곳이자 “가장 뜨겁게 오래 피는 마을”로 그려지는데, 이는 시인 자신이 제주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고봉준 평론가는 김효선의 시가 ‘바다’에 접속될 때 가장 돋보이며, 그 순간 가장 순도 높은 내면의 언어로 발화된다는 점에서 시인의 시를 “물의 언어”(「물 밖에서 가정하다」)라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 김효선의 시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제주’라는 삶의 터전에 맞닿은 언어로 발화되는 ‘그 너머’의 세계이다. 김효선의 시에서 ‘바다’나 ‘제주’ 이외의 것, 요컨대 일상적 경험에 대한 시적 변주의 양상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오후 내내 반짝이는 윤슬이었다가

저녁이 오면 사라지는 꽃들

 

초승에서 하현으로 넘어가는 동안

바다는 멀미로 기억을 잃고

 

오래 바라보면 볼수록 너는

내가 아는 얼굴이 아니야

우리 언제 만난 적 있나요?

 

하루에 70만 번 들썩이고 뒤집어지는

파도가 바다의 운명이라면

어느 가슴에서 뜨고 지는 달이길래

가도 가도 먼 지척일까

 

잘린 손톱들 모두 애월 바다에 와서

오래오래 뒤척이다

 

거스러미로 돋아나는,

―「몽상, 애월에서」 부분

 

「몽상, 애월에서」에서 화자는 ‘애월 바다’를 마주 보면서, 친근한 대상으로 여겨지던 바다가 낯설게 경험되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익숙한 것이 낯선 것으로, 주체의 배경이라고 간주되던 세계가 이질적인 세계로, 그리하여 “우리 언제 만난 적 있나요?”라고 물어야 하는 대상으로 등장할 때가 바로 시가 발화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두 개의 표정은 하나가 된다. 익숙한 것이 낯선 것으로, 투명하던 세계가 불투명한 세계로, 그리하여 대상이 “들을 수 없는 물의 언어”로 이야기할 때, 시인은 그것을 자신의 음성으로 번역하는 복화술사가 된다.

―해설 「물의 언어」에서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 사랑만큼 지독한 방부제가 있을까
바다유리심장
애인―어떤 방식으로든 이전에 죽은 모든 사람
크루아상
어느 악기의 고백
기연(機緣)
우표를 붙이겠습니까
미투리
먼 바다
나전칠 모란넝쿨무늬에 감기다
사랑하는 서쪽
분홍바늘꽃
개기 월식
골목이 없다면
여자 47호
멜랑콜리아
숨은물 뱅듸
이치(理齒)

2부 | 서서 울어야 할 때가 온다면
우리도 소풍일까
우리 작약할래요?
종묘제례악
아보카도는 기다리지 않는다
폴터가이스트
2월 29일
물 밖에서 가정하다
말하지 말고 꽃 할걸
서서 울어야 할 때가 온다면
오늘의 운석
그러므로 블라인드
체리의 종점은 어디인가
마가리타
세모의 세계
올라갈까요 찌르르
내 마음의 몬순을 지나

3부 | 가장 어렵게 읽히는 기억을 삽니다
해골 해안
눈많은그늘나비
먼물깍으로 걷는 나무
싱글몰트로 가는 길
외출
매일매일의 숲
시다모 내추럴
고양이와 튤립
너는 팥배나무 위에 종다리를 앉혀 놓고
로라의 바깥
밤의 해변에서
공중의 예언
탕탕이와 크로노스
치즈는 왜 숲에서 발견되었을까
봄은 짐승처럼 저녁으로 피어
라일락으로 가자

4부 | 천년이 지나도 한눈에 너를 알아보겠다
서로의 미륵을 부르다
나의 애완동물
우도에는 저녁이 산다
유효 기간
아날로그 감정
이녁이라는 말
하논의 시간
몽상, 애월에서
결혼
이별 알레르기
제철 눈빛
양하를 아시나요
바람까마귀
다시, 서귀포
각자도생(各自圖生)
나의 장례식

해설 | 고봉준(문학평론가)
물의 언어

작가

김효선 지음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태어났다. 2004년 계간 『리토피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교양도서’ 선정),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가 있다. 2018년 <아르코 창작기금>을 수혜했으며, 제2회 <시와경계문학상>, 제2회 <서귀포문학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제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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