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바오, 3월의 눈

김경순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20년 4월 25일 | ISBN 9788983928177

사양 127x188 · 312쪽 | 가격 12,000원

분야 국내소설

책소개

자기애와 질투가 만들어내는 권력의 생태도(生態圖)

김경순 장편소설 빌바오, 3월의 눈

 

2004년 ‘문학수첩 신인상’으로 등단하고, 2017년 제8회 〈김만중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김경순의 『빌바오, 3월의 눈』이 출간되었다. 장편소설 『21』에서 이삽십대 여성의 사랑과 성(性) 의식을 재기발랄한 문체로 생기 있게 그린 바 있고, 〈김만중문학상〉 은상 수상작인 장편 『춤추는 코끼리』에서 열한 살 소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김경순은 이번 작품 『빌바오, 3월의 눈』에서 지나간 사랑을 향한 집착에 두 남자 사이에서 흔들리고 젊음을 질투하는 사십대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소설은 작곡가이자 음악대학 강사인 주인공 주연이 전 연인이자 같은 음대 교수인 민석에게 교수윤리위원회에서 증인을 서달라는 문자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대학원 제자인 연두에게 성추행 건으로 고발당해, 사건이 있었던 그날 둘이 같이 있었다고 허위 증언을 해달라는 것. 아직 민석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지 못한 주연은 현재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음에도 흔들린다. 또한 민석과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과 맞물려, 젊고 예쁜 데다가 음악적인 재능마저 뛰어난 연두에 대한 질투는 주연을 더욱 피폐하게 만든다. 그런 와중 주연은 어릴 적 교통사고로 여읜 언니의 죽음에 숨은 비밀을 알게 된다.

『빌바오, 3월의 눈』의 키워드는 바로 ‘질투’와 ‘시기’다. 소설은 주인공 주연의 시선을 통해 촉망받는 젊은 교수 민석을 둘러싼 다양한 모습의 질투와 시기, 욕망을 그리고 있다. 주연과 민석, 민석과 연두, 연두와 주연, 그리고 기억으로 등장하는 언니와 주연의 관계 모두 질투와 시기의 정동(情動)에 휩싸여 있다. 여기에는 비단 연애 감정만이 아니라, 외무부 고위직에 있는 부모를 두고 음대 학장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민석의 권력 기반도 한몫한다. 주연은 아직 정교수가 되지 못한 시간강사로서, 연두는 음대 학비가 버거운 고학생으로서 민석을 향한 복잡한 감정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질투와 욕망의 정동에 붙들린 사랑은 결국 ‘자기애(自己愛)’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주연의 현재 연인인 기영이 상대에게 보여주는 ‘공감’과는 거리가 멀다. 사랑받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상처받기 싫은 자기애로 똘똘 뭉친 주체에게, 타자를 진정으로 보듬어 안는 사랑인 ‘공감’은 불가능한 감정이며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질투와 시기에 휩싸인다.

 

질투가 삼자관계에서 대상에 대한 사랑을 근거로 한다면 시기심은 오로지 파멸만을 목적으로 한다. 질투가 고상하기도 하고 비열하기도 하다면 시기심은 오직 비열하기만 하다”(p.284)

 

이 소설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고명철 교수는 “이러한 질투의 정동이 초래하는 비극적 파탄에 대한 성찰은 『빌바오, 3월의 눈』에서 읽어야 할 주요한 소설적 전언”이라고 말한다.

 

 

3월에 내리는 눈이 상징하는 삶과 사랑의 불가능성,

그리고 그 불가능성을 전복하는 예술

 

음악대학이 배경이고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클래식) 작곡가와 연주가이므로, 소설에는 음악과 관련된 묘사와 비유가 많이 등장한다. 제목인 ‘빌바오, 3월의 눈’ 역시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가곡 제목이다.

소설에 따르면 〈빌바오, 3월의 눈〉은 스페인의 시골마을 빌바오에 요양을 간 노르웨이의 한 작곡가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을 담아 작곡한 노래다. 하지만 빌바오는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지역이라고 한다. 따라서 빌바오의 3월의 눈은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불가능성은 삶일 수도, 사랑일 수도, 예술일 수도”(이상 p.70) 있다. 이는 복잡하고 불합리한 관계들로 이루어진 삶의 모순에 대한 탁월한 비유다.

주연은 대학원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의 어느 날, 신기하게도 눈이 내리는 밤에 민석을 처음 만나고, 사귀는 동안에도 헤어진 뒤에도 보통 연인보다 훨씬 무덤덤한 모습을 보이는 민석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 같은 민석 역시 그보다 먼저 엘리트 코스를 밟은 끝에 성공한 동생에게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뛰어난 외모에 지성까지 겸비했던 주연의 언니 하연은 간절히 원했지만 딱 하나 갖지 못한 음악적 재능 때문에 동생을 질투한다.

하지만 소설은 질투와 시기로 인한 파탄에 그치지 않고, 나름의 욕망이 끝을 맞이한 지점에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예술과 사랑의 불가능성을 성찰하도록 한다. 언니의 죽음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 주연은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언니를 위해 작곡한 곡을 완성함으로써, “되돌아갈 수 없는 사랑의 기억과 그리움”(p.188)이 갖는 복원 불가능성을 노래하는 예술적 진실의 힘을 발견한다.

 

요컨대, 김경순의 『빌바오, 3월의 눈』은 질투는 물론, 시기심과 착종된 욕망의 정동이 파멸로 전락할 수 있는 욕망의 생태도를 응시하고 그것을 성찰함으로써, 표면상 불가능한 것에 굴복하여 단념하는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불가능성 자체를 전복적으로 성찰하는 서사적 진실의 힘을 옹골차게 보인다. 그렇다. 이 서사적 진실의 힘이 소설의 존재 이유라는 점에서 김경순 작가의 또 다른 서사적 욕망의 정동이 펼쳐질 것을 기대한다.(‘해설’에서)

 

 


 

 

 

본문에서

 

증인 좀 서줄래요…

민석은 수고를 아끼지 않고 부호표를 찾아서 세 개의 점을 찍어 보내곤 했다. 문자나 메일에서 보이는 세 개의 온점은 그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오히려 부드러움으로 바꿔주는 스위치 역할을 해왔지만 이번엔 온점 하나에 그의 망설임, 혼란, 그리고 불안이 읽힌다.(p.9)

 

-꼭 진실이 중요한 걸까요. 카잘스의 그런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바흐한테도 잘된 일 아닐까요. 덕분에 바흐는 최고의 첼로 솔로곡을 작곡한 사람으로 남게 됐으니까요. 모두에게 좋다면 진실이 꼭 진실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더구나 카잘스가 악의적으로 왜곡한 게 아니라면 도덕적으로도 걸릴 게 없는 거고요.(p.29)

 

주연 또한 교수라는 허상을 향해 달려왔지만 동물들의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치열한 캠퍼스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대통령이나 과학자처럼 꿈일 뿐인 꿈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꿈을 꾸는데도 이루기 갑갑한 게 현실이었다.(p.50)

 

주연은 점점이 떨어지는 눈을 보며 〈빌바오, 3월의 눈〉을 떠올렸다. 노르웨이의 작곡가가 말년에 몸이 안 좋아 요양차 머물고 있던 스페인의 시골마을 빌바오에서 작곡한 가곡이었다. 그는 고국의 눈을 그리워하며 스페인 시골 마을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그 곡을 작곡했다. 빌바오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그 작곡가에게 3월의 눈은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불가능성은 삶일 수도, 사랑일 수도, 예술일 수도 있었다.(pp.69~70)

 

민석에 대한 질투 때문인가, 아니면 주연이 가지지 못한 음악적 재능을 연두가 가져서인가, 둘 다일 것이다. 확실한 건 연두가 패배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연두가 주저앉아 울고 있다면 진심으로 토닥여주고 연민할 수 있다. 그러나 주연이 사랑하는 남자나, 이십 년 이상을 바쳐온 음악에 연두가 더 뛰어나다면 진심으로 박수 쳐줄 수 없다.(pp.108~109)

 

비겁하다. 비열하다. 졸렬하다. 한심하다. 괴물이다. 언니처럼 조용히 자신을 파괴할 것인가, 아니면 민석과 연두를 파멸시킬 것인가.

질투의 본질은 비합리, 비논리성이다. 원인과 결과가 합치하는 과학보다는 종교에 가깝다. 그래서 질투의 협로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은 신분의 고하도, 학식의 고저도, 나이의 다소와도 상관없이 미치고 팔짝 뛰는 것이다.(pp.271~272)

 

주연이 연두와 민석에게 한 행동은 질투가 아니었다. 시기심이었다. 질투가 삼자관계에서 대상에 대한 사랑을 근거로 한다면 시기심은 오로지 파멸만을 목적으로 한다. 질투가 고상하기도 하고 비열하기도 하다면 시기심은 오직 비열하기만 하다.(p.284)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눈물이 쏟아졌다. 누구를 위해서도 울지 않은 그녀였다. 기영의 어린아이 같은 맹목의 사랑에 그녀는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녀가 기영에게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윤리적으로 꺼림칙하거나 자기애 때문이 아니다. 사랑 따위의 말로도 끼어들 수 없는, 기영의 깊은 인간에 대한 공감을 훼손하고 싶지 않아서이다.(p.289)

작가

김경순 지음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다녔고, 2004년 「쇼윈도」로 문학수첩 신인문학상을 받아 등단했다. 장편소설 『21』, 『춤추는 코끼리』를 출간했으며, 제8회 〈김만중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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