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박성현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20년 10월 15일 | ISBN 9788983928351

사양 124x198 · 128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39 | 분야 시집

책소개

시공을 점묘(點描)하는 타자의 집

박성현의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2009년 『중앙일보』로 등단한 박성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가 ‘시인수첩 시인선’ 39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뚜렷한 병명(病名)을 찾지 못한 채 응급실에 실려 가고 큰 수술도 받았지만, 아픈 내색 없이 항상 웃는 얼굴로 주변의 궂은일에도 선뜻 나서는 성품에 시단 선후배의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다.

종로에서 태어나 종로에 있는 직장을 다니는 서울 토박이인 시인은, 저녁 이후에는 시를 쓰지 않고 낮 시간을 쪼개 시를 쓰며, 도시인들의 비좁은(?) 표정을 읽고 그 느낌을 문장으로 풀어내려고 한다.

자신의 시가 건조하고 차갑다고 말하는 박성현 시인은 첫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2018)에서 “가상현실로의 산책”(장은석)을 선보인 바 있으며, 이번 시집에서는 “복안(複眼)에 포착된 다면과 사태의 다각성”(조강석)으로 빠르게 미끄러지며 기존의 시 문법을 한 번 더 뒤틀고 있다.

요컨대, 박성현 시인이 첫 시집의 ‘입체파 춘자’를 통해 주목했던 시공의 ‘뒤틀림’과 ‘균열’은 ‘주체-의-없음’이라는 반(反)-자본주의적 미학의 극단을 파생하면서 현대인들이 겪어야 하는 착란과 현기증, 히스테리로 요약되겠지만, 두 번째 시집은 ‘춘자’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두꺼운 유리벽을 걷어내는 방식으로 타자를 확장한다. 해설을 맡은 조강석 평론가의 문장처럼 “시의 붓이 새겨 넣은 타자의 영역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웅숭깊은 집”이 바로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에 포진된 내력과 깊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등단 때부터 보여 준 시인만의 독특하고 낯선 방식으로 독자들이 “박제화되어 가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내면을 섬세하게 점검하는” 할 수 있는 미적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정동적 동요의 영역, 시선과 경험의 경계를 지우다

 

박성현 시인이 바라본 첫 번째 ‘타자의 집’은 3인칭 관찰자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이른바 ‘엽편소설’의 형식을 취하면서 서사의 유입을 허용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시인의 문장은 그 경계를 지워 버린다. 마치 F. 베이컨이 인간의 육체에서 지워 버린 ‘인간성’처럼 말이다. 이른바 ‘정동적 동요(affective fluctuations)’로 요약되는 첫 번째 그룹의 시편은 3인칭 소설처럼 파국이 진행 중인 사건을 다룬다. 물론 시를 읽는 독자들은 작품 속의 시선이 숨은 1인칭(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박성현 시인은 지배적 정서의 표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1인칭 화자를 최대한 배제한 채 마치 시계(視界)의 주재자인 양 화면을 부려 놓고 여기에 파국을 던져 놓음으로써 ‘정동적 동요’를 일으킨다. 이러한 방식이라면 ‘세상의 모든 타자들’이 시야에 포착될 수 있다.

신이 만든 세상은 적절하고 신비로웠으며 매혹적이었다 그는 만족해하면서 스타벅스로 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며칠 후 신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아담을 만들고 아담이 외롭지 않도록 이브를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다 아는 얘기다

(……) 몇 명의 아담과 이브를 추방했는지 모른다 날이 갈수록 신은 능숙해졌다 9월이 지나고 12월이 다가왔다 거실에 앉아 뉴스를 보는데 한강에 신원불명의 벌거벗은 시체 두 구가 떠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신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같이 작업하던 왓슨에게 설계를 미루자고 제안했다 한참 후 신은 스타벅스에서 에스프레소와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달빛이 은은히 내려앉은 창가에 오래 앉아 있었다 옛날에도 그랬다

― 「왓슨」 부분

 

B.C. 954년 시바가 눈을 떴다 천 년을 먼저 깨어났다 별자리가 뒤바뀌는 뒤숭숭한 일기가 계속됐다 별의 색과 운행을 바라보는 자의 눈도 사원의 어둠과 엉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머리는 뱀을 닮아 갔고, 목과 등에도 뱀이 새겨졌다 봄의 별은 빠르고 겨울의 별은 모호했다 제사장은 모든 죽음이 왕국의 우물에서 시작할 것이라 말했다 불안은 징후로 나타났다 (……) 여기까지가 인도와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똑같이 기록하는 역사다 그러나 출애굽 외전은 이렇게 덧붙였다: 남자와 남자가 아닌 것들이 먼저 출발했으나 지금까지 누구도 시온에 도착하지 못했다

― 「출애굽 외전」 부분

 

 

사물의 영역’, 시공을 점묘(點描)하다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가 집중한 ‘타자의 집’의 두 번째 형식은 ‘사물의 영역’이다. 글자 그대로 사물을 시야의 중심에 놓고 그 내력을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시집 3부에 배치된 시 전체가 ‘사물의 영역’을 부제로 하고 있다. 문장의 지향도 ‘시청’을 중심으로 그 반경에 놓인 ‘아케이드’의 화려한 모습과 박물관에 전시된 ‘몰락한 왕국’의 쓸쓸한 풍경을 비롯해 시인 개인의 경험의 영역에서 신화나 혹은 무속으로 변용되는 흔치 않는 여러 사건들이다. 거듭해서 읽으면 마치 시간을 여행하는 급행열차를 탄 듯한 느낌도 받는다. 시공을 점묘하듯 써 내려간 문장과 3인칭에서 1인칭으로의 급격한 전환과 몰입 때문인바, 이것이 두 번째 형식의 특이점이다.

당신은 중국 출장 중에 목각인형을 사 온다 중국식 무덤에서 자주 발견되는 손바닥만 한 목각인형이다 그 인형은 진시황의 토기 병사들처럼 생매장됐으며 매우 고약했던 식인 풍습의 흔적도 묻어 있다 (적어도 품질보증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모두 구체적이고 생생한 표정을 짓고 있어 마치 “식당에서 저녁 먹고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게 끌려온 사람들을 아틀리에 어디쯤 놓을까 고민하다가 당신은 테디 인형 가랑이 사이에 목각인형을 놓았다 롯데가 잠실 한복판에 거대한 종유석을 건축한 이유와 같다

(……)

당신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아틀리에로 간다 오른손 엄지로 중국식 목각인형을 쓰다듬는다 황홀해서 눈을 뗄 수 없다 산 것과 죽은 것도 아닌, 이 흔해 빠진 유령들에게 가족과 같은 유대감과 놀라운 청교도적 사랑을 느끼는 것 인형이 불타 버리는 악몽을 꾼 다음 날 불안한 당신은 국가기록물보관소에 가서 그의 증명서를 신청한다 국가는 국민의 출생만 증명한다고 공무원이 말한다 그리고, 장난감 등록은 3층 소관입니다

―「중국식 목각인형―사물의 영역․15」 부분

 

목각인형 하나가 집 안의 ‘아틀리에’에 놓이자 이 인형은 이내 사위를 장악한다. “진시황의 토기 병사들처럼 생매장됐으며 매우 고약했던 식인 풍습의 흔적도 묻어” 있는 듯한 이 인형은 ‘잠실 한복판에 놓인 거대한 종유석’처럼 집 안의 ‘아틀리에’를 장악하고 그 주인에게 “가족과 같은 유대감과 놀라운 청교도적 사랑”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리고 시가 이 대목에서 끝이 났다면 한바탕 소동에 불과했을 이 사물의 영역에의 ‘틈입’은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예기치 않은 귀결을 맞는다. 역사와 결부되었을지 모를 ‘일화’를 지닌 인형이라면 공적 기록물보관소에 등록되어야 마땅하지만 인형의 존재 증명서 신청에 대한 답은 “장난감 등록은 3층 소관”이라는 말이다. 내력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물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소관 영역 밖의 일인 것이다.

 

 

당신의 영역’, ‘타자를 사유하다

마른 볕에 당신이 고여 있었다 뜻밖이라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당신은 꼭 그만큼 물러났다 볼 수만 있고 닿을 수 없어 마음만 우둑했다 볕은 숲을 흔들면서 꽃가루를 날렸다 북쪽으로 떠나는 철새처럼 크게 휘어지고 출렁거렸다 하늘이 노랗게 덧칠되다가 물에 씻긴 듯 맑아졌다 너는 어디를 보고 있냐는 당신의 옛 물음 같았다 나는 소리가 없으므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그만 몸이 무너졌다

―「바라보다」 전문

 

세 번째 형식은 바로 ‘나’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발화다. 시집에 실린 상당수의 시에서 가장 큰 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의 영역이며, 그만큼 ‘나’와 ‘당신’이 맺는 관계의 특수성이 고스란히 새겨진 시들이 많다. 시집 맨 마지막 작품인 「바라보다」는 “볼 수만 있고 닿을 수 없”는 자리에 “당신”이 있다고 말한다. “당신이 고여 있었다”라는, 시간적 경과가 깃든 표현으로 ‘당신’을 그리는 마음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집에는 ‘엽서’, ‘빙하’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우체국에서 엽서를 잔뜩 샀다 밤마다 종이배를 만들었다 주소가 없으니 가라앉을 뿐이었다”(「팽목」),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그 두껍고 어두운 곳에서 당신을 녹일 햇살의 울음을 기다려야겠습니다”(「빙하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는 “볼 수만 있고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당신’에 대한 ‘나’의 심리적 이정표들이다. 이 형식의 시들에서는 ‘당신’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게 하는 거리일지언정 바로 그 거리를 붙들고자 하는 바람을 ‘나’가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엽서를 쓰고 우표를 붙였다

짧고 가는 문장이 두 줄로 포개져 있었다

읽을 수 있을까, 이 비틀거리는

새의 말을 쓸쓸한 발톱이 휘갈겨 쓴

마음의 잔해들을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을 따라갔다

가다 멈추고 공원 근처

가까운 편의점에서 생수와 빵을 샀다

벚나무 아래 나무의자에는 녹지 않은 눈이 가득했다

녹을 수 없는 눈과

녹지 않는 눈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엽서를 꺼내 그 두 줄의 문장에서

희고 간결한 새를 꺼내 날려 보냈다

―「우체국」 전문

 

 

“녹을 수 없는 눈”과 “녹지 않는 눈”의 차이를 묻는다는 것은 당신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현상’과 당신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의지’의 경계를 가늠해 보겠다는 것이다. 우체국에서 엽서를 보내는 대신 이 두 문장에서 “희고 간결한 새를 꺼내 날려 보냈다”는 것은 현상과 의지의 교환을 삶의 태도로 수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집에서 가장 뛰어난 대목 중 하나가 바로 이 “녹을 수 없는 눈”과 “녹지 않는 눈” 사이에서 깃을 펴는 “희고 간결한 새” 이미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 내 몸으로 기우는 저녁이 쓸쓸했네
저녁이 머물다
속초
쓴맛
밤새 서리가 내리다
수선화
멀리 갔던 새가 나를 비집고 들어왔다
맨발
팽목
그리운 그랑 블루
희고 간결하게
늦은 저녁이 찾아왔다
우체국
빙하기
하염없이
가을 무렵 악기 한 소절

2부 | 당신의 몸에 바람이 파고든 흔적이 있다
흰 눈
얼음 눈물

화분
검정은 멀리 갔을까
세한도, 봄꿈
나의 유일한 행성
거미별
나와 말라리아와 늙은 난쟁이 의사
종이인간
발목과 의지
새와 의지
열일곱 개의 나무계단이 있는 집
그림자의 회화와 춤
밤의 휘장과 노래

3부 | 사물의 영역
물방울을 뜯어내면―사물의 영역・1
흔해 빠진 유령―사물의 영역・2
유령 소나기―사물의 영역・3
서핑보드―사물의 영역・4
아직 희미하게 보인다―사물의 영역・5
1985년 에티오피아 우표―사물의 영역・6
하, 춘화(春畵)―사물의 영역・7
밤새 지랄이다―사물의 영역・8
1976년 검은 달―사물의 영역・9
개미가 끓었다―사물의 영역・10
무진―사물의 영역・11
서울의 낮은 언덕들―사물의 영역・12
왕국의 우물과 시계태엽―사물의 영역・13
사마르칸트―사물의 영역・14
중국식 목각인형―사물의 영역・15
악몽―사물의 영역・16
시청이 있다―사물의 영역・17

4부 | 나다와 저녁이 걸어간다
국립극장
세상의 끝, 딜런
출생증명서가 필요해―시청이 있다・1
북문 3층 12호실―시청이 있다・2
우리는 설계자가 아니야―시청이 있다・3
왓슨
요른
출애굽 외전
창과 라
카페 뮐러
그물과 의지
정오의 눈부신 빛
봄날의 허밍
바라보다

해설 | 조강석(문학평론가)
타자의 집

작가

박성현

2009년 『중앙일보』 등단.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201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2018)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2019)

우수출판콘텐츠 선정(2020)

서울교대 출강

시집으로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2018)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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