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도
김종철 시집
출판사 문학세계사
발행일 1984
분야 시집
사양
ISBN

시인의 말

| 독자를 위하여 | 덤으로 살아 본 삶

아버지 김재덕 님과 어머니 최이쁜 님 사이에 3남 1녀 중 막내로 세상을 어렵게 보게 된 셈이다.
막내동이는 그 무렵 혹은 그 전에 다 그러했는지 모르지만, 피임이 제대로 발달되지 못한 시절이어서 ‘덤’으로 바깥세상을 구경하게 된 것이다.
덤으로 들어선 핏덩이를 떼어 내기 위하여 나의 어머니는 조선간장을 석 되가량 마셨고 몸을 뒹굴기도 했지만 그 무렵의 가난은 더욱 허리를 조여 왔으리라.
어머니는 더욱 불러 오는 배를 안고 새로 태어날 아기의 이름과 꿈과 사랑을 갖기보다는, 생활에 짓눌린 가난에 못 이겨 매일 불편한 꿈과 현실을 가슴 아파했었다.
결국 가족과 이웃의 상의로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그 무렵 그런대로 재력은 있었지만 자식이 없어 외로워하는 집에 약간의 식량 같은 것으로 태내의 나를 뒷거래하기로 결정을 했었다.
원하지 않는 자식의 탄생을 세상 바깥에 먼저 나와 있는 태 밖의 사람들이 적당히 결정을 보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나는 10여 개월 달수를 제대로 채울 수 있었고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태어났다. 나의 이야기는 이것이 첫 번째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내가 이 시집의 서문에 이 축복받지 못한 탄생을 기록하는 것은, 이제 내 나이가 불혹이 가까워지고 또한 ‘덤’으로 살아갈 시간들이 아직까지는 조금 더 남아 있기에 이 글에서 밝히는 것이다.
세상을 덤으로 살아 본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 없고 좋은 것인가를 여러분들은 잘 모를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포기된 희망이고 처음부터 바둑판에 잘못 둔 포석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詩業에 전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방식이나 형태로운 세상에 바람을 쐬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덤으로 살아왔고 또한 살아갈 시간들을 나는 누구보다 편안하게 지켜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시집 제목을 ‘오이도’라 붙였다.
외롭고 추운 마음을 안고 한 번씩 자신으로부터 외출을 하고 싶을 때 찾아가는 섬이다. 이제 이 섬은 내 속에 들어와 나와 함께 덤으로 살아가고 있다.
작품 순서는 근작으로 비롯되어 있다.
이제부터는 좀 더 부지런해지고 그리고 좀 더 욕심을 내어 시작에 몰두해 볼 생각이다.
여태까지 써 왔던 모든 작품들을 다 버리고 비워 내는 마음에서 여기 시집을 엮었다.

김종철

목차

제1부 떠도는 섬
떠도는 섬
섬에 가려면―오이도 1
朴君―오이도 2
보름과 그믐밤 사이―오이도 3
神굿하는 날―오이도 4
사람의 섬―오이도 5
몸은 보이지 않는데―오이도 6
바둑돌―오이도 7

제2부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옥수수
아내는 外出(외출)하고
화초 일기
몸 1
몸 2
몸 3
기차를 타고
비의 家出―목월 선생을 생각하며
집만 나서면

제3부 가을 家出
딸에게 주는 가을
續 딸에게 주는 가을
곰인형
明洞을 지나며
겨울 週末
일기초
스케치
가을 家出
가을 悲歌
소나기
숨바꼭질
兵士와 아버지와 그리고 나―창군 서른세 돌에
새날의 바람이 분다―경신년 정월 초하루 아침에
새치를 뽑으며―현충일 29돌 아침에

해설/이동하
소시민의 憂愁

시 읽기

보름과 그믐밤사이 -오이도 3

집집마다 아낙들은 새치를
뽑는다
보름과 그믐밤 사이
까마귀 깃들이 집집의 눈썹 밑에
유난히 많이 떨어진다
바다 사내들의 등 굽은 하루가
키 작은 경기도 군자면 정왕5리의
몸을 가린다
키 작은 오이도의 늙은 하반신에
어제의 물이 다시 젖는다
젖은 사내들의 고장난 나침반이
물살을 따라오며 다시 젖는다
젖은 것들은 밤마다 섬으로 건너와
늙은 까마귀와 함께 운다

이 마을을 떠나지 못한 과부 아낙들이
밤마다 함께 운다
새벽 두시의 염전 바닥이
조금씩 마른다.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내 고향 한 늙은 미류나무를 만나거든
나도 사랑을 보았으므로
그대처럼 하루하루 몸이 벗겨져 나가
삶을 얻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다고 일러주오

내 고향 잠들지 못하는 철새를 만나거든
나도 날마다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으로 집을 옮겨 지으며
눈물 감추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일러주오

내 고향 저녁 바다 안고 돌아오는 뱃사람을 만나거든
내가 낳은 자식에게도 바다로 가는 길과
썰물로 드러난 갯벌의 비애를 가르치리라고 일러주오

내 고향 홀로 집지키는 에미를 만나거든
밤마다 꿈속 수백 리 걸어 당신의 잦은 기침과
헛손질로 자주자주 손가락을 찔리우는 한 올의 바느질을 밟고
울며울며 되돌아 온다고 일러주오

내 고향 유년의 하느님을 만나거든
기도하는 법마저 잊어버리고
철근으로 이어진 도시의 언어와 한 잔의 쓴 술로
세상을 용케 참아온 이 젊음을
용서하여 주어라고 일러주오

내 고향 떠도는 낯선 죽음을 만나거든
나를 닮은 한 낯선 죽음을 만나거든

나의 땅에 죽은 것까지 다 내어놓고
물 없이 만나는 떠돌이 바다의 一泊까지 다 내어놓고
이별이별이별의 힘까지 다 내어놓고
자주자주 길을 잃는 이 젊은 유랑의 슬픔을 잊지 말아 달라고 일러주오.

아내는 외출하고

아내는 외출하고
어린 두 딸과 잠시 빈 방을 채우며 뒹굴다가
그들이 눈을 붙이는 사이
적막 같은 비가 한 줄기 쏟아진다
두 딸년의 잠든 눈썹 사이로 건너뛰는 빗줄기
나는 적막이 되어
유리창 끝에 매달리고
한 방울의 물이 우리를 밖으로 내다놓는다
한 방울의 물이 또다른 한 방울의 물과 어울리는 동안
우리 집의 모든 물은 적막같이 돌아눕고
어울릴 수 없는 한 방울의 물만이
창턱을 괴고
외출한 한 방울의 물소리에 귀를 열고 있다.

딸에게 주는 가을

딸아, 이담에 크면
이 가을이 왜 바다 색깔로 깊어 가는가를 알리라.
한 잎의 가을이 왜 만리 밖의 바다로 나가 떨어지는가를 알리라.
네가 아끼는 한 마리 家犬의 가을, 돼지 저금통의 가을, 처음 써본 네 이름자의 가을, 세상에서 네가 맞은 다섯개의 가을이
우리 집의 바람개비가 되어 빙글빙글 돌고 있구나.
딸아, 밤마다 네가 꿈꾸는 토끼, 다람쥐, 사과, 솜사탕, 오똑이가
네 아비가 마시는 한 잔의 소주와 함께 어떻게 해서 붉은 눈물과 투석이 되는가를 알리라.
오오, 밤 열시 반에서 열 두시 반경 사이에 문득 와 머문 단식의 가을

딸아, 이날의 한 장의 가을이 우리를 싣고 또 만리 밖으로 나가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