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의 귀향
김종철 시집
출판사 시학
발행일 2009
분야 시집
사양 132x215, 133쪽
ISBN 9788991914599

시인의 말

솜씨 좋은 목수는 목상자를 만들 때 한 번에 아래위가 ‘딱’ 맞아떨어지는 소리를 내게 해야 제격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는 세상일과 시는 좀처럼 딱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번에 내 시가 멈춘 고향은 나를 보는 것마저 낯설어합니다. 내 시의 귀향은 또 한 번 야반도부를 끝낼지 모르겠습니다. 내 모든 상상력의 근원이요, 돼지들과 닭까지 한데 뒤섞인 이 마을의 꿈을 나는 베갯머리에서 멀리 둔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루에 두 번 새벽이 왔던 마을, 우수수 흔들리는 대숲과 울창한 밤나무들, 긴 밭고랑을 타고 넘는 푸른 옥수수 터널, 어디서나 철철 넘쳐흐르는 맑은 개울, 산비탈 발등에 자주 걸려 넘어지는 쌍무지개, 이 마을의 새벽은 한 번은 산에서 내려오고 또 한 번은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활처럼 휘어진 수평선을 바라보면 나는 언제나 팽팽한 작은 시위가 되었습니다. 못의 사제로 나를 한없이 느리게 키워 준 곳, 오늘은 비록 나를 받아 주지 않아도 내 시의 출발과 못의 유서는 이곳에서 다시 쓸 것입니다.

초또의 지워진 길 위에서
김종철

목차

제1부 초또는 대못이다
밤기차를 타고―초또마을 시편·1
어머니의 장롱―초또마을 시편·2
손님 오셨다―초또마을 시편·3
문고리 잡다―초또마을 시편·4
장닭도 때로는 추억이다―초또마을 시편·5
나무젓가락―초또마을 시편·6
국수―초또마을 시편·7
빨래―초또마을 시편·8
어깨동무―초또마을 시편·9
어머니의 젖꼭지―초또마을 시편·10
비 오는 술독―초또마을 시편·11
새 그림―초또마을 시편·12
오줌싸개―초또마을 시편·13
울보 기도―초또마을 시편·14
마, 졌다 캐라!―초또마을 시편·15
외삼촌 최망기님―초또마을 시편·16
복태 아부지―초또마을 시편·17
우야꼬!―초또마을 시편·18
양밥놀이―초또마을 시편·19
비빔밥 만세―초또마을 시편·20

제2부 당신 몸 사용 설명서
망치를 들다
유서를 쓰며
당신 몸 사용 설명서
봄날은 간다
호미를 보면
도시락 일기
상추쌈
아내의 십자가
장닭의 노래
내가 만일
눈물의 방
당신을 지우며
파주에서 보낸 엽서
한여름 날의 추업
못자리 내는 날
금 그어진 책상처럼
그를 떠올리면
깨진 유리창의 법칙

제3부 순례 시편
별―순례 시편·1
벨라뎃다에게―순례 시편·2
그곳에 가면―순례 시편·3
귀향―순례 시편·4
개똥밭을 뒹굴며―순례 시편·5
마사비엘 동굴에서―순례 시편·6
도둑성인 하나 섬겨―순례 시편·7
칫솔질을 하며
피리 부는 소년
못의 부활

제4부 창가에서 보낸 하루
창가에서 보낸 하루
창을 열다
실패한 못의 혁명
아침밥이 없는
꽁보리밥
함부로 쓴 화살을 찾으러
텔은 사과를 쏘지 않는다
첫 티샷을 위하여
여기가 거긴가
드디어 머리를 올리다
복되도다
시가 무어냐고?
나이 탓이다
망치꽃
독도는 못이다

해설/김재홍
못과 밥, 또는 운명의 십자가를 위하여

시 읽기

빨래 -초또마을 시편 8

한겨울 마당에 널어 두었던 빨래
해 지기 전 걷으라고 누나는 신신당부했습니다
우리는 노는 데 그만 정신 팔려
깜깜한 밤 되어서야 부랴부랴 걷었습니다
장작개비처럼 뻐등뻐등 얼어붙은 빨래,
그날 장터에서 늦게 돌아온 누나는
몽둥이로 등짝을 후려쳤습니다
풀죽은 빨래도 화나면 몽둥이가 되었습니다

봄날은 간다

꽃이 지고 있습니다
한 스무 해쯤 꽃 진 자리에
그냥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일 마음 같진 않지만
깨달음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축복 받은 일인가 알게 되었습니다

한순간 깨침에 꽃 피었다
가진 것 다 잃어버린
저기 저, 발가숭이 봄!
쯧쯧
혀끝에서 먼저 낙화합니다

도시락 일기

아내는 오늘도
도시락을 싸 가지고 출근합니다
이제나저제나 미덥지 않은 남편
입가에 붙은 꼿꼿한 밥알 같은
먹다 남은 반찬 냄새 같은
서툰 나의 처세를
아내는 자반고등어 한 손처럼
꼬옥 안아 줍니다
숟가락 젓가락 나란히 놓인
저녁 밥상 하늘 위로 나는 철새
우리는 함께 책장 넘기는 소리 듣습니다
어쩌다 바람 부는 날에는
헐거워진 문짝 고치다
자주 제 손등 찧는 못난 나를
아내는 꿈속에서도 도시락 싸듯 달려옵니다

칫솔질을 하며

요즘은 이 닦는 법을 다시 배웁니다
하루 세 번 삼종기도처럼
아침에 닦는 칫솔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온종일 해 둘 말과 생각을 구석구석 닦습니다

점심때 닦는 칫솔질은
생각 없이 불쑥 튀어나온 독설과
이빨 사이 낀 악담을 닦고 파냅니다
어쩌다 부러진 이쑤시개의 분노와 마주칠 때는
이내 거품을 물고 있는 후회로
양치질을 한 번 더 해 둡니다

잠들 때 닦는 칫솔질은
하루 종을 씹고 내뱉은 죽은 언어의
껍질을 헹구어 내고
생쥐같이 몰래 들락거렸던 당신의 곳간에 경배 드리는 일입니다

하루의 재앙이 목구멍에서 나온 것을,
때늦은 반성문 같은 졸린 칫솔로
못의 혓바닥까지 막막 긁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