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의 사회학
김종철 시집
출판사 문학수첩
발행일 2013
분야 시집
사양 160쪽
ISBN 9788983924742

시인의 말

신랑신부의 초야를 ‘첫날밤’이라 딱 붙여 쓴다
여행지에서 보낸 첫 밤은 ‘첫날’ 하고 ‘밤’을 띄어 쓴
‘첫날 밤’이다
이승에서 하루하루 맞은 밤들은 ‘첫’ 하고 ‘날’ 하고
‘밤’을 띄어 쓴 ‘첫 날 밤’이라 쓰고,
다 함께 ‘천날빰’이라 읽는다
이 시집에 못질한 천날빰의 못들은
나 죽은 뒤 나로 살아갈 놈들이다.

김종철

목차

1. 못의 사회학
슬픈 고엽제 노래
아멘
대팻밥
노숙자를 위한 기도
우리 시대의 동물원
강정 소인국
모비 딕
죽은 시인의 사회
암탉이 울면
니가 내 애비다
모기 순례
전어를 구우며
네 속까지 몰라서야
수의는 주머니가 없다
후회한다는 것

2. 나로 살아갈 놈들
나 죽은 뒤
돌쩌귀 고리못에 대하여
거멀못에 대하여
무두정에 대하여
족임질못에 대하여
광두정에 대하여
곡정에 대하여
철정에 대하여
나사못 경전
시를 씻다
빨래판
봄날
당신의 천국
거룩한 책
마더 데레사

3. 연민으로 후욱 끓은 면발들
콩나물
칼국수
배추김치
상추쌈
김장하는 날
영등포 블루스
폐차장 가는 길
떡갈나무의 별
가을이 오면
개 같은 인생
민어회를 씹으며
영도다리
흑백사진 한 장
입관
우리들의 묘비명
놋쇠종을 흔들며

4. 우리들의 신곡(神曲)
젊은 잎새들의 전우에게
용병 이야기
겨울 연옥
지포라이터를 켜며
빨간 팬티
그 무렵, 말뚝처럼 박힌
대수롭지 않게
군번 12039412, 작은 전쟁들
손톱을 깎으며
나라가 임하오시며
눈물고개

작품론/김재홍
절망의 묵시록 또는 희망의 계시록을 위하여

시 읽기

모기 순례 -못의 사회학 11

해 질 무렵 참수터 입구
모기 한 마리가 맴돌았다
쉿!
침묵의 순례를 가르치는
죽은 바오로 동상이 입술을 가리켰다
무릎 순례하는 동안
나는 무수히 물어뜯겼다
윙윙거리는 소리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래그래 실컷 빨아 먹어라
차라리 발끝까지 뒤집어쓸
위선의 침대보가 없어서 좋았다

당신의 목 잘린 제단과
순교의 머리가 통통 튀어 오른 자리마다
은혜로운 맑은 샘이 솟아올랐다
나는 긴 기도와 함께
흡혈귀처럼 엎드려 목을 축였다
그때 누군가 등 뒤에서 손바닥으로 나를 탁 쳤다
내 순교의 머리통을 든 모기가
사방 피로 튀었다
그날 피를 너무 빤 모기처럼
세상을 잘 날지 못하는 나는
한 마리 모기로 빙의되었다
쉿!
얼치기 신자만 보면 피 빨고 싶다
두 손 모으고 눈 감은 속수무책의 저 얼치기
빨대만 꽂으면
취하도록 마실 수 있는 저 통통한 곳간!

나 죽은 뒤

순례에 올랐다
가장 추운 날
적막한 빈집에
큰 못 하나 질러놓고
헐벗은 등에
눈에 밟히는 손자 한번 업어보고
돌아가신 어머니도 업어보고
북망산 칠성판 판판마다
떠도는
나는 나는 나는

못대가리가 없는 별
못대가리가 꺾인 별
못대가리가 둥글넓적한 별
못대가리가 고리 모양인 별
못대가리가 길쭉한 별
못대가리가 양 끝에 둘인 별

이 모두가
나 죽은 뒤 나로 살아갈 놈들이라니!

칼국수

마음에 칼을 품고 있는 날에는
칼국수를 해먹자
칼국수 날은 날카롭다
식칼, 회칼, 과일칼
허기 느끼며 먹는 칼국수에
누구나 자상刺傷을 입는다

그럼 밀가루 반죽을 잘해서
인내와 함께
홍두깨로 고루 밀어보자
이때 바닥에 붙지 않게
마른 밀가루를
서너 겹 접은 분노와 회한 사이
슬슬 뿌리며
도마 위에서 일정하게 썰어보자
불 끈 한석봉 붓놀림같이
한눈팔아서는 안 된다
특히 칼자국 난 면발들이
펄펄 끓인 다시물에 뛰어들 때
같이 뛰어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고통이 연민으로 후욱 끓어오를 때
어린 시절 짝사랑 같은
애호박 하나쯤 송송 썰어
끓는 면발 사이 넣는 것도 좋겠다

우리 모두 마음에 칼을 품은 날에는
다 함께 칼국수를 해 먹자

영도다리

오전 10시와 오후 4시
부산 영도다리가
끄어덕 끄덕 하루 두 번 오르내리는 때를
이곳 토박이들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 불렀다
그날 항구의 경적이 길게 울리고
커다란 다리가 끄어덕 올라가면
슬픔을 등진 돛단배들이
뱃고동 사이로 천천히 지나갔다

오전 10시와 오후 4시
집집마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
배꼽시계보다 정확한 영도다리
슬프게 끄어덕 올라가면
우리들도 일제히 뒤꿈치 들고
먼 바다로 오줌을 갈겼다

고등어 정어리 갈치 가자미
고래 고기까지 흔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리북 사투리와 서울 말씨가
유난히 질퍽하게 밟히는 자갈치 좌판에
덧댄 헝겊 같은
눈물 자국이 선명히 밴
호랑이 담배 피우던 그 시절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