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 부활의 집
김종철 유고시집
출판사 문학세계사
발행일 2014
분야 시집
사양 135x195mm, 164쪽
ISBN 9788970755908

시인의 말

이것저것 끌어 모아 시집을 낼까 두렵다. 그래서 작은딸의 힘을 빌려 눈에 뜨이는 원고부터 힘겹게 정리했다. 부끄러운 수준이다.
혹시 시간 지나 책이 되어 나오면 용서 바란다.

그리고 잊어 주길 바란다.

김종철

목차

1
유작으로 남다
언제 울어야 하나
암 병동에서
펑펑 울다
산행
버킷리스트
오늘의 조선간장
안녕
제가 곧 나으리다
산춘 기도문
나는 기도한다
큰 산 하나 삼키고
치바의 첫 밤
풍수지리
둘레길에서
절두산 부활의 집
엄마, 어머니, 어머님

2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는다
―몸의 전사편찬사
튀어나온 못이 가장 먼저 망치질 당한다
―위안부라는 이름의 검은 기차
첫 번째 못이 박히기 전에 두 번째 못을 박지 말라
―현병숙이라 쓰고, 스즈코라 부른다
어두운 데서 못 박으려다 입만 다친다
―제국의 위안부
못은 자루를 뚫고 나온다
―조센삐
못은 머리부터 내리쳐라
―아베 마리아
망치를 들면 모든 것이 못대가리로 보인다
―위안부냐, 홀로코스트냐
좋은 철로 못을 만들거나 좋은 사람을 군인으로 만들지 말라
―돌격 1호
망치에 대하여

3
애월
재의 수요일
택배의 노래
The End
이렇게 썼다
평생 너로 살다가
숨바꼭질
내가 수상하다
달리는 희망버스
총각김치
불조심
개망초를 꺾다
늙은 소처럼
태산에 대하여
날개 없는 짝퉁
겨울 수박

4
다시 카프카 읽다
피렌체 출장 길에서
로마의 휴일
우리의 피사를 찾아서
두오모 성당에서
신곡을 찾아서
스톤 헨지에서
어린 양
성탄 선물
파티마 가는 길
파티마 성모님
파티마를 찬양하며
처음 온 파티마
파티마 기도
시의 순례
가위눌림
해바라기 기도
하느님의 종
아빌라를 떠나며
십자가의 성 요한
올리브 방앗간에서
겟세마니에 와 보니
사해를 바라보며
당신을 위하여
부활 축일

5
목마름에 대하여
나는 윶가처럼
발목 잡힌 야망
이런 날은
못난 놈
못 쓰는 시인
남부민 초등학교
책상 모퉁이 기도
부러진 티펙
다시 티샷을 하며
해슬리 나인브릿지
DMZ 철책선의 봄
김수환

작품 해설 / 김재홍
못의 유서 – 못.시학.별사

시 읽기

유작으로 남다

유작으로 남기고 싶지 않아
밤새 고치고 다듬는다
실컷 피를 빤 아침 하나가
냉담冷淡한 하느님과 광고를 믿지 않은
자들만 분리 수거해 갔다

아침마다 뽀로로를 즐겨 보던
네 살배기 손주도 변했다
로봇으로 변신하는 자동차
또봇에 정신이 팔린 것은
우리가 관棺과 수의壽衣에 관심을 가질 때였다
나를 태울 장의차가 손주의 로봇으로 합체될 때
실컷 젖을 빤 아침이 와도 나는 깨지 않겠다

이제 어디에서나 이름이 빠진
내가 차례를 기다린다
내장과 비늘을 제거한 생선이
먼저 걸리는 생의 고랑대
몸만 남은 체면이 기도의 바짓가랑이 붙잡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타협하고 그리고 순명하다가
무릎 꿇는 또봇의 새 아침
쩍 벌어진 애도의 쓰레기통이나 뒤져
악담 퍼부은 유작들만 분리 수거되는 날이다

버킷리스트

시한부 병상
불펜에서 만지작거렸던
생의 마지막 변화구인 볼펜으로
실밥 꾹꾹 눌러 던진
세 개의 스트라이크와 일곱 개의 볼
내 손을 벗어났다
견제구 두 개로
재산 파일을 수습하고
회사 대차대조표를 정리했다
커브 볼 세 개로
집사람 노후 대책
어린 손자 미래 보기
그리고 지인과 작별 준비하고
위협구인 빈볼 하나쯤으로
세상과 화해하고
일곱 번째는 직구로
꼭 가고 싶은 곳을 찾고
여덟, 아홉은 스트라이크 존에서 벗어난 볼
열 번째는 기습 번트에 출루시킨
부끄러운 내 욕망과 남루한 생의 옷가지
일생의 마운드에서
결코 교체되지 말아야 할 나는 패전투수
열 개의 버킷리스트로 기록된 자책점들!

절두산 부활의 집

몸과 마음을 버려야만 비로소 머물 수 있는 곳
아내의 따뜻한 손에 이끌려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와 시안에도 들렀다
내 생의 마지막 투병하는데
절두산 부활의 집을 계약했다고 한다
신혼 초 살림 장만하듯 아내와 반겼다

절두산은 성지순례로 가족과 들렸던 곳
낮은 나에게도 지상의 집을 사랑으로 주셨다
머리가 없는
목 잘린 순교의 산
오, 나도 드디어 못 하나를 얻었다
무두정無頭釘
부활의 집 지하 3층에서
망자와 함께 이제사 천상의 집 지으리라

─2014년 6월 22일 오후 7시 22분 연세 암병동에서

평생 너로 살다가

평생 시를 썼지만
돈 된다는 생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후배 시인은 집도 사고 생활도 꾸렸다
사양하지 못해 받은 원고료까지 셈하니
3개월치 월급밖에 되지 못한
한 생애, 시를 살다 간다

투정도 하지 않고
한 줄에만 골몰하며
세상일 숙제하듯 내다보면서
평생 일천만 원 벌기 위해
수억 원 재능을 버린 나는
가족에게 시로 밥 한 끼 먹인 적 없다

시는
애써 외면할 수 있는 가난이었기에
이는 곧, 나다 외치고 싶지만
잘 가거라
끝내 팔리지도 읽히지도 않은
나에게 빚만 남겨 두고
떠나는 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