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시인은 2014년 7월 5일 작고하셨다.

김종철 시인이 생의 마지막 8년 4개월을 살았던 집은 서초동에 있는 아파트 15층이었다. 그 집엔 아직도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다.

김종철 시인의 문학관을 짓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아 고민한 끝에 웹사이트에다 ‘김종철 시인의 집’을 짓기로 하였다. 멋지고 근사한 집은 아니지만 ‘김종철 시인의 집’은 시인이 전 생애에 걸쳐 쓴 詩들로 지어질 것이다.

그가 쓴 詩들을 읽어보고 감상하며, 시인으로 살아온 그의 삶을 엿보면서 시인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또한 그의 詩를 연구하는 자료로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 2021년 7월 5일 강봉자

일촌一寸 김종철 金鍾鐵

1947년 부산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을 수료했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또 한 번 당선되었다. 시집으로는 《서울의 유서》 《오이도》 《오늘이 그날이다》 《못에 관한 명상》 《등신불 시편》 《못의 귀향》 《못의 사회학》, 유고시집 《절두산 부활의 집》, 형제시인 시집 《어머니, 우리 어머니》, 영문시집 The Floating Island, 시선집 《못과 삶과 꿈》, 《못 박는 사람》, 시전집 《김종철 시전집》이 있다.

제6회 윤동주문학상, 제4회 남명문학상, 제3회 편운문학상, 제13회 정지용문학상, 제12회 가톨릭문학상, 제8회 박두진문학상, 제12회 영랑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 교수,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겸임 교수, 한국작가회의 자문위원,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장, 한국시인협회 회장, 종합 문예지 《문학수첩》과 시 전문지 《시인수첩》 발행인 및 편집인을 역임했다.

연보

1963 부산 배정고등학교

1947년 2월 18일(음력) 부산시 서구 초장동3가 75번지에서, 김해 김씨 김재덕金載德과 경주 최씨 최이쁜崔入粉 사이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 시인 김종해金鍾海는 바로 위의 형.

1960년 부산 대신중학교 입학. 2학년 때 부산 중앙성당에서 가톨릭 영세 받음.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그해 여름부터 시로 일기를 쓰기 시작함. 가을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고, 학교 대표로 부산과 경상남도 전역의 백일장에 참가해 입상하면서 이름을 알림. 3학년 초여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집이 불타 어린 시절의 사진 등 물품을 모두 소실함.

1963년 부산 배정고등학교에 문예 장학생으로 입학. 나중에 소설가가 된 이복구와 친교를 맺음. 부산과 영남 지역 문예 대회를 휩쓸며 다수의 상 수상.

1968 서라벌예대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재봉> 당선. 시인 박정만과 함께 박봉우, 황명, 강인섭, 이근배, 신세훈, 김원호, 이탄, 이가림, 권오운, 윤상규 등이 참여한 ‘신춘시’ 동인에 참여. 김재홍과 교우 시작. 3월 미당 서정주가 김동리에게 적극 추천하여 문예장학 특대생으로 서라벌예술대학에 입학. 이시영, 송기원, 감태준, 박양호, 김상렬, 오정희, 윤정모, 김민숙, 신현정, 오정환, 조갑상 그리고 선배 이동하, 김형영 등과 교우. 군 입대를 한 사이 서라벌예술대학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으로 바뀌고, 여러 사정으로 뒤늦게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학원에 입학함.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바다 변주곡> 당선. 필명 ‘박낙천’으로 응모. 심사위원 박목월은 새로운 신인 기용을 막았다며 불같이 화를 내고, 박남수와 함께 자진 취소를 종용함. 3월 입영 통지서를 받고 논산 훈련소로 입대함.

1971 배트남전쟁 참전

1971년 베트남전에 자원해 참전. 백마부대 일원으로 깜라인 만과 냐짱에 배치받음. 병과는 위생병으로 치료와 약제계를 맡음. 사령부 지시로 후반에는 백마사단장인 김영선 장군의 전속 수행원으로 발탁, 특수 임무를 수행함.

1973년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인 ㈜태평양화학에 입사해 홍보실과 무역부에서 10여 년간 근무.

1975년 1월 진주 강씨 강봉자姜奉子와 결혼. 첫 시집 《서울의 유서》(한림출판사) 상재. 첫딸 은경恩京 태어남. 이탄, 박제천, 강우식, 이영걸, 김원호 등과 ‘손과 손가락’ 동인 결성. 미당 서정주도 참여해 두 차례 작품 발표함.

1977년 둘째 딸 시내 태어남.

1984년 두 번째 시집 《오이도》(문학세계사) 상재. 동인 ‘손과 손가락’을 ‘시정신詩精神’으로 개명함. 정진규, 이건청, 민용태, 홍신선, 김여정, 윤석산이 새로 참여함.

1975 신혼시절 만삭의 아내와 함께

1989년 7월 선배 김주영, 김원일, 이근배 등과 함께 국내 문인 최초로 백두산 기행. 기행문을 써 3개월간 KBS와 여성지에 연재함. 12월 어머니 별세.

1990년 세 번째 시집 《오늘이 그날이다》(청하) 상재. 제6회 윤동주문학상 본상 수상.

1991년 11월 도서출판 문학수첩 창립.

1992년 네 번째 시집 《못에 관한 명상》(시와시학) 상재. 제4회 남명문학상 본상 수상.

1993년 제3회 편운문학상 본상 수상. 도서출판 북@북스 창립.

1989 백두산 기행

1997년 이해부터 1998년까지 평택대학교에 출강.

1999년 이탈리아 시에나 대학교의 문고 시리즈로 영문시집 The Floating Island (Edition Peperkorn) 출간.

2000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에서 제3회 자랑스러운 문창인상 수여.

2001년 다섯 번째 시집 《등신불 시편》(문학수첩) 상재. 제13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2002년 이해부터 2004년까지 모교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 교수를 맡음.

1993 제3회 편운문학상

2003년 봄 종합 문예 계간지 《문학수첩》 창간. 김재홍, 김종회, 장경렬, 최혜실이 초대 편집위원을 맡고, 권성우, 박혜영, 방민호, 유성호가 2대, 김신정, 서영인, 유성호, 정혜경이 3대, 고봉준, 이경재, 조연정, 허병식이 4대 편집위원을 맡음. 2009년 겨울호(통권 28호)로 임시 휴간함.

2004년 이해부터 2006년까지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겸임 교수를 맡음.

2005년 형 김종해와 함께 형제시인 시집 《어머니, 우리 어머니》(문학수첩) 상재. 7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회의에 부의장 자격으로 참석. 백두산 묘향산을 비롯해 평양 주변의 주요 지역을 방문함.

2009년 여섯 번째 시집 《못의 귀향》(시와시학) 상재. 제12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수상. 시선집 《못과 삶과 꿈》(시월)을 활판인쇄 특장본으로 상재함.

2001 제13회 정지용문학상

2011년 봄 시전문 계간지 《시인수첩》 창간호 발간. 《문학수첩》을 이어 통권 29호로 발간. 장경렬, 구모룡, 허혜정이 초대 편집위원, 김병호가 편집장을 맡음. 2대 편집위원은 구모룡, 김병호, 문혜원, 최현식이 맡음.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장으로 추대됨. 가톨릭 문인으로서는 최초로 ‘제1회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참가함. 정호승, 이해인, 전옥주 등 다수의 문인과 신부 조광호, 교수이며 신부인 서강대 김산춘 등이 참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로 뽑힘.

2012년 한국작가회의 자문 위원,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을 맡음.

2005 평양 남북작가회의

2013년 일곱 번째 시집 《못의 사회학》(문학수첩) 상재. 한국가톨릭문인회 창립 이후 50년 만에 첫 무크지 《한국가톨릭문학》 발간. 7월 <한국 대표 명시선 100>의 하나로 《못 박는 사람》(시인생각) 상재. 제8회 박두진문학상 수상.

2014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추대됨. 한국저작권협회 이사 역임. 제12회 영랑시문학상 수상.

2014년 7월 5일 암 투병 끝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

2014년 10월 유고시집 《절두산 부활의 집》(문학세계사) 상재.

2016년 7월 2주기를 기리며 《김종철 시전집》(문학수첩) 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