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그날이다
김종철 시집
출판사 청하
발행일 1990
분야 시집
사양
ISBN

시인의 말

우리는 공범적인 비극의 시대를 살아왔다.
우리 등뒤에 남아 있는 한 시대의 역사는 이제 발길질을 받으며 다른 시간이 물굽이를 바꾸는 동안 숨죽이며 멈춰 서 있다. 시커먼 썩은 물에 지나지 않은 역사와 추억이 사물의 여러 진실을 틀어막고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결코 무슨 상징이 아니다.
오늘도 내가 이곳을 걸어다니는 것은 그것이 나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길들여진 그 질서 속에서 내가 일어서야겠다는 것은 그저 아무것과도 닮고 싶지 않다는 작은 자각에서 비롯 된 것이다.
그러한 작은 자각이 창문을 열었을 때 나는 불혹의 나이를 지나 있었고 나와 함께 젊었던 모든 사물의 얼굴들이 오늘은 모두 중년의 문턱에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남의 것처럼 낯설은 나를 보는 것은 어쩌면 불행일지 모른다.
생텍쥐페리는 “나는 내 시대를 증오한다”고 죽기 전에 썼다. 그러나 나는 그럴 용기가 없다. 아직까지 나는 이 시대의 한쪽밖에 보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대의 공범자요, 가해자요,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비로소 ‘사람이 살지 않는 비극’은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세 번째 시집을 상재한다.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것이 내시의 전부다. 이제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자리잡힘이 보이고 시를 무겁지 않게 쓰는 법이 열렸다. 시를 여는 마음이 요즘은 따로 있는 듯 생각된다.

1990년 1월
김종철

목차

제1부 어린 왕자를 기다리며
어린 왕자를 기다리며·1
어린 왕자를 기다리며·2
어린 왕자를 기다리며·3
어린 왕자를 기다리며·4
어린 왕자를 기다리며·5
그날 밤·1
그날 밤·2
그날 밤·3
못에 대하여·1
못에 대하여·2
못에 대하여·3
못에 대하여·4
못에 대하여·5
밥에 대하여·1
밥에 대하여·2
호박에 대하여·1
호박에 대하여·2
호박에 대하여·3
호박에 대하여·4
호박에 대하여·5

제2부 오늘이 그날이다
만나는 법
시법
낙타를 위하여
편한 잠을 위하여

앉은뱅이꽃
컴퓨터를 치며
컴퓨터와 함께
컴퓨터 바둑
시간여행·1
시간여행·2
시간의 집
오늘이 그날이다·1
오늘이 그날이다·2
오늘이 그날이다·3
오늘이 그날이다·4
오늘이 그날이다·5

제3부 사람이 소로 보이는 마을에서
별을 세며
나무기러기
우리 시대의 산문

갈보 순이는
갈보 순이에게
풍경
서울의 찬가
사람이 소로 보이는 마을에서
낚시법
그건 아니다
잔을 들며
삶이 뭔지 말한다면
어머니
사진첩에서
겨울 나그네
가교
콩나물 기르기
줄타기
보이지 않을 때
사순절 아침에
신부님
해미를 떠나며
말씀에 대하여
열쇠꾸러미가 보일 때
오이도를 떠나며
금연법

해설/윤성근
오늘의 삶, 오늘의 시

시 읽기

어린 왕자를 기다리며 2

뱀 얘기는 정말 싫습니다
그러나 보아구렁이는 예외입니다
속이 보이는 보아구렁이와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구렁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와 참지 못할 것 같습니다
중절모 하나와
수줍은 코끼리 한 마리가
어른과 아이를 너무 쉽게 구분시켰기 때문입니다

붕붕 달리는 버스를 보고 있으면
보아구렁이 속에 들어가 있는
수줍은 코끼리가 문득 떠오릅니다
달리는 코끼리 옆구리에
창문을 여러 개 그려놓고
사람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습니다
정류장마다
코끼리 복부에서 우루루 쏟아지는
작은 사람을 보고 있으면
차라리 행복해 보입니다
그것이 더구나 그림 동화라면

오늘도 아침 출근시에
만원버스 속에서 구두가 짓밟히고

웃옷의 단추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보아구렁이 속도 이처럼 갑갑했을 것입니다
코끼리를 삼킨 무서운 보아구렁이가
아직도 모자로 보이는 시대에
우리들의 만원버스 속의 지옥도 인생도
언제까지나 모자를 쓰고 다닐 것입니다

만나는 법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내일은 언제 오나요
하룻밤만 자면 내일이지
다음날 다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일인가요?
아니란다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또 하룻밤 더 자야 한단다

고향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어머니 임종의 이마에
둘러앉아 있는 어제의 것들이 물었습니다
얘야 내일까지 갈 수 있을까?
그럼요 하룻밤만 지나면 내일인 걸요
어제의 것들은 물도 들고 간신히 기운도 차렸습니다
다음날 어머니의 베갯모에
수실로 뜨인 학 한 마리가 날아오르며 다시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일이지
아니에요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하룻밤을 지내야 해요

이제 더 이상 고향에서 급한 전갈이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집에는
어머니는 어제라는 집에

아내는 오늘이라는 집에
딸은 내일이라는 집에 살면서
나와 쉽게 만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그날이다 1

그렇다, 오늘이 그날이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고 슬퍼하고
눈물짓는 그날이다
사랑하고 기도하고 축복받는 그날이다
오늘이 어저께의 어깨를 뛰어넘고
내일의 문 앞에 당도했을 때
우리는 꿈만 꾸었었다
오늘이 그날임을 알지 못했다

나를 거둬가는 그날인 줄을
내 낟알을 털어 골라두는 그날인 줄을
나를 넣고 물을 부어 밥솥에 끓이는 그날인 줄을
나를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씹는
그날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소리내어 울고
어떤 이는 술 마시며 욕질하고
어떤 이는 무릎 꿇고 연도하는 그날인 줄을

언제 우리가 오늘 이외의 다른 날을 살았더냐
어째서 없는 내일을 보려고 하였더냐
어제는 오늘의 껍질이요 내일은 오늘의 오늘이다
모든 것이 오늘 함께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오늘이 그날이다

겨울 나그네

빈손으로 그대를 찾으려 함은
나의 꿈을
몇 장의 지폐와 밥으로 바꾸려 함이다
내가 가득 찬 손으로 그대를 가까이하려 함은
그대의 꿈을
절망과 시간의 노예로 바꾸려 함이다
오늘 밤 그대가 내 마음 속에 숨는다면
그대를 찾는 일은 머리카락의 한 올 새치 같은 것
그러나 그대가 그대의 껍질 속에 숨는다면
나는 울며 돌아서리라
그대와 나는 취하기 위해서 술을 마셨지만
그 술은 언제나 먼저 깨어 있고
잔 속에 잠든 것은 눈물뿐이었다
오늘 밤에는
우리 이웃의 어떤 사람이 죽어가는 오늘 밤에는
바람이 분다
만리 밖의 한 장의 바람이
그대와 나 사이에 상처난 몸을 숨기는 것을
오늘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