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잎을 키웠다

유지인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23년 12월 22일 | ISBN 9791192776958

사양 128x188 · 160쪽 | 가격 12,000원

분야 시집

책소개

“예술의 내부도 밤과 낮처럼 명징했으면 좋겠다”
‘예술’이라는 안갯속에서 시를 불러일으키며
흐릿한 순간들이 번쩍일 때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다

2011년 계간 《시안》 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유지인의 시집 《안개가 잎을 키웠다》가 117번째 문학수첩 시인선으로 출간되었다. 유지인의 이번 시집은 시인이 등단한 지 12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이다. 시인이자 동시에 문학치유 강사 또 플로리스트로 활동해 온 시인의 10여 년간의 내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시와 한판 겨루기 같았던/그 밤의 힘”(〈시인의 말〉)들을 쏟아 내면서 예술의 본질을 유심히 관찰한다. 예술이 가진 의미는 제한이 없으며 그렇기에 누구에게나 한계 없이 열려 있다. 유지인은 이러한 예술의 본질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를 말하면서, ‘바람’의 이미지를 통해 이를 형상화해 낸다. 꽃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가위로 잎을 쳐 내는 플로리스트처럼, 시를 형용해 내고자 무수한 낱말의 가지를 꺾어 내 선보이는 59편의 시를 통해 언제나 비의에 가려져 있는, 그렇기에 손을 뻗고 싶은 예술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한 생애가 저리 투명할 수 있다면 봄은 다시 오지 않겠냐”
모호한 세계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일

안개 속에서 무수히 타종되었던 바람의 문장은
궂은날 눈만 홀리다 금세 사라지는 여우별이거나
의식의 창을 가린 검은 조각의 매지구름이거나
깨어나 메모장 찾다 다시 든 그루잠 속에서
번개처럼 잡아챈 시의 나비 날개다

안개 장마당에서도 시의 눈속임을 하는
야바위꾼을 만날 수 있다 절벽은 어디에나 있다
그럴 땐 감각의 집어등을 밝히고 허밍,
몰입으로 숨죽인 뱃고동 소리가 더 멀리 간다
아사시한 안개 스토리가 이어지는 곳에서
안개를 먹고 자라난 사물 아이의 눈은
웅숭그레 깊어져 있다
― 〈안개가 잎을 키웠다〉 부분

유지인의 시들은 독자를 희뿌연 새벽안개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안개는 불투명한 몸피로 세계를 가리면서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시인은 모든 것을 희미하게, 비가시적으로 만드는 안개의 그러한 특성이 삶의 전모를 감추어 어쩌면 빈약하고 얄팍할 수 있는 세계에 깊이를 부여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준다. 그리고 유지인에게 이러한 안개 속을 헤쳐 나가는 과정은 예술의 다른 이름이자 동시에 삶의 방법론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안개 속에서 “절벽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럴 땐 감각의 집어등을 밝히고 허밍”을 하듯이, 안개 속에 가려진 희끄무레한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웅숭그레 깊”다.

여름은 호흡으로 너무 꽉 잡으려 하면 목울대를 타고 도망쳐 버린다 튀어 나가려는 여를 부드러운 ‘ㄹ’이 끌어당기고 ‘ㅡ’가 어르고 구슬려 ‘ㅁ’으로 주저앉게 해야 한다 안팎의 열기를 눌러 앉히고 사이좋게 공존케 하는 여름― 하고 발음하다 보면 단전 밑이 서늘해지고 치솟는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다
― 〈입속의 사계〉 부분

안개 속에서 예술의 본질을 더듬어 나가는 일은 난해하다. 모호한 말들은 제자리에 내버려 두고 예술에 조응하는 말들만을 건져 올리는 과정은 수많은 비교와 고민의 과정이 따른다. 따라서 시인은 언제나 마음을 대신할 단어를 찾아 애를 태우면서 시가 되지 않는 문장들과 씨름하다 지친다. 하지만 유지인의 화자는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로와 어려움조차 시의 양식이라는 듯,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시가 될 수 있을 단어를 한 번 더 발음한다. 이러한 풍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시를 읽는 우리들 속에도 있던, 언젠가 꿈꿨던 열망이 다시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엇이든 오래 품으면 몸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지
밤마다 받아 마신 겹눈을 깨우는 이슬의 문장
듣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는 말이 있다고
우두커니 있을 때에도 하늘의 창은 열려 있어
통점의 마디를 딛고 생겨나는 마디들
“우리 기억에 불을 붙이자”
거침없는 보폭에 허공도 저만치 물러서고
바람의 측량이 시작되었다
― 〈견고한 마디〉 부분

시집의 해설을 맡은 김수이 문학평론가는 유지인이 마치 “음악의 선율이 흐르듯 유려”하게 단어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어떻게 “내면화하는가를 정교하고 아름다운 분석을 통해 묘사”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유지인은 사물을 치밀하게 묘사하지만 어렵지 않게, 대상을 정교하게 분석하나 이해보다 감응에 가깝게, 말로 그림을 그리듯 시를 전달한다. 시인의 화자를 따라가다 보면 “듣지 않아도 저절로” 시의 노래가 들리는 순간을,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처럼 “우두커니 있을 때에도” 몸에 맞닿는 예술의 빛깔을 마주할 수 있다.

목차

시인의 말·5

1부│예술의 눈초리에 매달린 속눈썹처럼
아트페어 · 13
입속의 사계 · 15
착시 · 17
안개가 잎을 키웠다 · 19
침묵에 눌린 건반의 입술 · 21
천년 달빛의 조연을 기리다 · 23
바람미술관 · 25
달의 빈집 · 27
꽃의 우화 · 29
무엇으로 지은 집이기에 · 31
빨간 첼로소녀 · 32
오로라, 색의 카덴차 · 34
푸른 시의 연인들 · 36
목련나무 교실 · 38
피죽새 · 40

2부│발톱은 눈 속에 튀어든 기억으로 웃자란다
마두금 · 45
너무나 가벼운, 담론 · 47
블루, 만져지지 않는 · 49
나비잠 · 51
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53
나신裸身 · 55
코피노 · 57
양서류의 피는 빨갛다 · 59
혹성, 혹은 어떤 일 · 61
바다는 썰물 중 · 63
개기월식 · 65
생크림케익 · 67
데인다는 말을 몰랐다 · 69
햇볕정원 · 71
3부│아직 물고기의 아가미는 선홍색이다
젖은 빵 말리기 · 75
롤러블레이드 · 77
카테리니, 카테리니 · 79
춤의 화법 · 81
맛별 돋는 밤 · 83
나비 날개에 스치다 · 85
보라에스키스 · 86
거울보기 · 88
하얀지문 · 90
견고한 마디 · 92
인화되지 않는 웃음 · 94
만인 옹기상 · 96
초록 물고기 · 98
디지털 상상력 · 100
가로등이 수상하다 · 102
반달로 뜬 추석 · 104
긴 통화는 암호다 · 106

4부│달에 간 널 보려고 시를 읽었다
조등弔登 · 111
밥나무 · 112
장미와 미라 · 114
검정의 페르소나 · 116
시바를 만나다 · 118
비밀 · 120
남겨진 말은 무럭무럭 자란다 · 122
카레엔 인도가 없다 · 124
셀룰러 메모리 · 126
소실점 · 128
단단한 집 · 130
설익은 예감 · 132
이별 아닌 이별 · 134

해설 | 김수이(문학평론가)
바람과 안개의 ‘내부’를 투시하는 이중의 심미안 · 137

작가

유지인 지음

1964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2011년 〈너무나 가벼운, 담론〉 외 4편으로 계간 《시안》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문학치유 강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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