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타향살이로 체득한 모국어에 대한 깊은 미감

체 게바라와 브라우니

조미희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4년 5월 9일 | ISBN 9788983925183

사양 125x205 · 184쪽 | 가격 11,000원

분야 시집

책소개

20여 년 타향살이로 체득한 모국어에 대한 깊은 미감

조미희 시인의 시집 『체게바라와 브라우니』가 출간되었다. 2007년 『평화신문』으로 등단해 이국적인 정서와 디아스포라의 서정 등을 시 속에 담아온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한층 더 깊어진 모국어에 대한 탐미적 감각을 보여준다.
1991년에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래 20년이 넘게 먼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시인은, ‘척박한 모국어의 땅’에서 이중 언어를 사용하며 남다른 말에 대한 감수성을 얻게 되었다. 자서에서 “나는 이 속에서 단물 뚝뚝 흐르는 모국어라는 열매를 품고 한 입의 맛으로 익어가는 언어의 오감이 되었으면 한다”는 문장을 통해 언어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을 드러낸 시인은, 자신의 감각을 번역한 결과물인 시가 국경도 인종도 초월하는 언어로서 독자들에게 전해지기를 희망한다.
메마른 대지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빗물이 조미희 시인이 말하는 시의 본연의 모습이다. 그는 ‘포도의 눈물’ ‘인도블록으로 가려진 푸석한 도심의 뿌리에 떨어지는 빗물보다 진한 수혈’과 같은 시구들로 자신의 시가 의미하는 바를 드러낸다. 메마른 도시에서의 상처 입은 삶을 치유할 수 있는 한 방울의 포도즙이 시이며, 그 시를 쓰기 위해 생의 밀도를 풍부하게 감각해왔다고 시인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두 언어의 사이에서 체득한 남다른 감수성을 통해 시가 가진 본연의 힘인 ‘치유’를 발견하는 조미희 시인의 이번 시집은, 국내 시인들의 시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독특한 서정을 보여줄 것이다.

무의식으로 여행하며 발견하는 문명에 의한 상처

조미희 시인의 이번 시집에 담긴 많은 시들은 무의식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시인은 내면의 풍경 앞에서 낯설어하지만 그 세계에 과감히 발을 들여놓는다. 앓고 있는 현실의 나를 치유하기 위한 첫걸음인 동시에 내 속에 숨겨진 진실한 목소리를 발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잠에서 깬 듯 구름을 갈아엎어 씨를 뿌리고 / 영문 모르는 세 떼들 아직 하늘에 떠 있지 / 찬란한 적막을 탐닉하던 붉은 노을이 / 나무들의 귀를 당겨/세상에는 없는 은유법으로 속삭이는 것을 보았지 / 잎을 다 버린 나무들의 모세혈관이 / 하늘에 탁본되고 있었지
―「대평원을 달리다」부분

내면의 자아인 ‘당신’은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구름을 갈아엎어 씨를 뿌리’)하거나 새로운 세상이 창조되는 것을 지켜본(‘붉은 노을이 나무들의 귀를 당겨 세상에는 없는 은유법으로 속삭이는 것을 보았’ ‘잎을 다 버린 나무들의 모세혈관이 하늘에 탁본되고 있었’)다. 시인에게 있어 시의 공간은 현실의 가치와는 반대되는 새로운 것들이 창조되는 곳이다. 현실의 상처를 드러내기에 앞서 시인은 이처럼 모든 것들이 내면의 힘을 통해 변화하는 신비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내면의 더 깊은 곳에 닿았을 때, 시인은 상처의 근원이 자연 위에 세워진 문명이었음을 고백한다.

일찌감치 전기 톱에 잘려나간 가지들은 지금/어느 도심 밖의 행성이 되었는지 / 해묵은 밑동 하나 여백처럼 묵묵히 / 푸른 먹을 갈고 있다 / 익숙하나 때로 낯선 이 유목의 땅에 / 무엇이 너를 끈질긴 부력으로 떠오르게 하는지 / 봄밤의 방명록에는 / 소통부재의 명단이 빼곡하다
―「자정의 푸른 손」부분

새로운 문명의 꿈을 일상에서 발견하다

‘전기 톱’과 같은 남성성(폭력성)에 대항하는 세계들을 조미희 시인은 종달새의 울림 가득한 둥지나 열대 우림의 울창한 정글 너머로 보이는 설산 등, 자연의 에너지가 넘치는 풍경들로 그려낸다. 시인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이러한 자연적인 풍경들은 그 자체로 그녀의 시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조화로움, 오색찬란함, 부드러움이 강조되는 시 속의 세계는 강한 남성성에 반대되는 유연한 여성성이 드러나는 풍경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인은 그러한 풍경을 일상 속에서도 발견한다.

오색상처의 맛에 대하여 사람들은 왜 입을 닫나? / 애타게 끓어올라도 36.5도를 넘지 못하는 불꽃도 있어 / 울컥울컥 푸른 혁명을 꿈꾸는 여자 // 부엌을 장악한 게릴라들 / 뜨거운 브라우니를 꺼내는 여자의 손에서 / 체 게바라의 지문이 발견된다 / 노릇노릇 금박의 양탄자를 깔아도 / 생의 외벽에선 어쩔 수 없는 그을음이 / 혁명의 불멸성을 증명한다
―「체 게바라와 브라우니」부분

목덜미에 새긴 ‘체 게바라’의 문신을 자랑하며 시대의 일탈을 꿈꾸는 한 여인은 ‘부엌의 게릴라’로 표현된다. 그녀는 혁명을 실행하는 이가 아니라 ‘울컥울컥 푸른 혁명을 꿈꾸는’ 이이다. 그녀는 요리라고 하는, ‘맛의 감각’을 통해 혁명을 상상한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고 한 체 게바라의 말처럼, 시인은 내면의 언어를 미각으로 표현해낸 요리를 통해 가슴속 불가능한 꿈의 한 조각을 꺼낸다. 노릇노릇 금박의 양탄자를 깔아도 생의 외벽에서 생긴 어쩔 수 없는 그을음은 시인의 초라한 현실이지만, 그것을 응시하는 것은 ‘혁명의 불멸성을 증명’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앞선 시에서 내면의 혁명을 품고 있던 것보다 훨씬 진보적이다.
조미희 시인은 이처럼 문명에 반하는 새로운 질서를 현실화하기 위해, 세계와 삶에 내재되어 있는 시를 부지런히 길어 올리고 있다. 조금씩이나마 시를 통해 현재의 문명을 이상향인 ‘무지개 문명’으로 전화시키는 것, 이것이 이번 시집을 통해 시인이 이룩한 작은 혁명이다. 보다 실험적이고 감각적인 시도를 통해 이전의 전형적인 서정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시인의 시는 앞으로도 독자들에게 이국적이고 섬세한 언어의 미감을 전할 것이다.

작가

조미희 지음

1961년 경북 칠곡 출생. 1991년 아르헨티나로 이주. 2006년 在아르헨티나문인협회 문학작품 공모전 시부문 최우수상. 2006년 <문예춘추> 신인문학상 수상. 2006년 재외동포재단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2007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07년 在아르헨티나 한국문인협회 ‘아름다운 작가상’ 수상. 평화문단 동인. 재아가톨릭한글학교 교사. 在아르헨티나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현재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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