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 동안의 긴 고백

하린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9년 3월 29일 | ISBN 9788983927408

사양 124x198 · 172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22 | 분야 시집

책소개

우리 시대의 외곽에서 바라본 너머

변방에서 써 내려간 아웃사이더의 세 번째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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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는 저마다 시를 짓는 자기만의 자리가 있다. 허물어져 가는 뒷골목, 낯선 여행지, 도시 한복판, 또는 이 세상 아닌 우주 어딘가. 시를 낳는 시인의 성정과 체질에 따라 시는 각기 다른 곳에서 첫 울음을 터뜨린다. 이른바 시의 ‘출생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수첩 시인선 스물두 번째 주인공 하린 시인의 시는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세상의 가장자리, 위태롭고 날카로우며 서늘한 자리에서 그는 시의 탯줄을 잘랐다. 변방에서 태어난 그의 시들은 절절하면서도 격정적이다. 소위 ‘아웃사이더’가 “스스로를 향해 건네는 존재론적 다짐과 세상을 향해 던지는 저항의 외침”(유성호)이기 때문이다.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아웃사이더의 실존적 고백’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찰나에 가까운 ‘1초 동안’에 이루어지는 매우 ‘긴 고백’이다.

특히 시인 하린은 시창작 강의의 달인으로 불린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된 저서 시클이 문청들 사이에서 시창작방법론의 교과서로 평가받으면서 덩달아 그의 시들도 재평가를 받고 있다. 시를 쓰는 방법론을 독자적으로, 체계적으로 펼쳐놓은 시인의 시가 그의 이론에 얼마나 부합하는지가 세간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1초 동안의 긴 고백』은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과 『서민생존헌장』에 이은 하린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그가 첫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에서 “도시적 삶의 불모와 폐허를 증언”했다면, 그다음 시집 『서민생존헌장』에서는 “현대 도시 생태에서 낙오한 주체의 실패와 좌절, 우울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에 발표하는 『1초 동안의 긴 고백』에는 “우글거리는 아웃사이더의 감정”을 담았다. 그는 주류, 중심, 핵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자리한 시인 자신과 곁의 또 다른 아웃사이더들을 긍정하며 쓰다듬는다. 그러한 까닭에 그의 시는 변방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마냥 음울하거나 어둑하지만은 않다. “시가 되길 거부하는 것들”(「세 번째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에게 다가가 끝내 그것을 ‘시’가 되게 하고 마는 그. 그가 서 있는 가장자리로 한 걸음 내딛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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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의 시를 가능하게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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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처럼 아찔한 가장자리를 아슬아슬 걸어 나가야만 하는 그에게 시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시에서 드러나는 시인의 정체성은 두 말 할 것 없이 아웃사이더다. 그는 자신이 아웃사이더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나는 아웃사이더라고 소리친다. 심지어 “어제도 오늘도 나는 ‘루저’일 뿐”(「객관성」)이라는 말을 툭 던지기까지 한다. “속울음까지 들”(「푸시」)켜 버릴 것만 같은 투명한 어둠 속,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의 가장자리, 세계의 바깥에 던져진 존재이지만, 그렇기에 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마음껏 받아 누린다. 이를 테면 “어중간한 태도와 가면을 전부 벗어던지”는 일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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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오늘 밤 절벽에게 고백할래

사람은 새가 될 수 없지만 새를 품을 순 있다고 말할래

새를 꺼내는 그 순간, 1초 동안의 긴 고백

어둠이 왜 이렇게 투명한 건지

윤곽을 가진 것들이 온전히 자신을 다 드러내 놓기 좋은 시절이라고

속울음까지 들킬 것 같아

불편이나 불안의 차이를 알 필요 없을 것 같아

노크를 하듯 툭, 머리로 지구를 한번 두드려 볼래

손을 쓰지 않은 채 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미리 써 놓은 유서를 방치해 둔 채

절벽 아래 스프링은 없지만

몸 안에서 잔뜩 부풀길 좋아하는 관념어들을 위해, 폴짝 뛰어 볼래

물론 고백은 자정이 적당하겠지만

자정이 지나도 계속해서 어둠 다음에 어둠이겠지만

한 번의 고백으로 절벽 없는 날이 완성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온전히 선명해지려는 태도를 참을 수 없으니

나 오늘 밤 절벽에게 반드시 고백할래

어중간한 태도와 가면을 전부 벗어던지고

불편한 프랑켄슈타인을 끝장내 볼래, 진짜로 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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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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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잘 안다. “어둠 다음에 어둠이” 올 것임을, “한 번의 고백으로 절벽 없는 날이 완성될 순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온전히 선명해지려는 태도를 참을 수 없”어 절벽에게 고백하려 한다. 뒷걸음치거나 에돌아가는 비겁함을 떨치고, 온몸이 부스러질지언정 전력을 다해 절벽 끝으로 질주하는 시인의 저력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고백과도 같은 시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안에 내재된 ‘아웃사이더的’ 정서가 곧 시인 “자신이 겪어 온 실존적 천형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시를 가능케 했던 태반임을 강렬하고도 지속적으로 고백해”(유성호)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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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짓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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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에게 시를 짓는 일이란, “눈을 감고 떠도는 문장의 살덩어리를 뱉어 내는”(「시작법(詩作法)」) 것이다. “금요일의 후회가 월요일까지 살아”남아 꿈틀거릴 때, 그 집요한 감정(집착) 앞에 공손히 옷깃을 여미고 문장이라는 살덩어리를 각혈하듯 뱉어 내는 일, 그것이 바로 시작(詩作)이다. 그렇게 뱉어 내거나 토해 낸 문장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피비린내”(「세 번째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난다. 그는 “싱싱하지 않은 핏덩어리”를 물고 할퀴는 고양이 때문에 두 번째 문장에서 세 번째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시인 자신이 뱉어 낸 핏덩어리가 그다지 싱싱하지 않다고 자각하는 까닭에 도무지 다음 문장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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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행은 지극히 밋밋했고

마지막 행은 극단적으로 맥박이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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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보존할 방부제가 필요했지

모든 창문을 밀봉할 암막 커튼이 필요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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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움직임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미열처럼 손가락만 겨우 살아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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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고루 외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

시에 미친 놈, 간명하게 욕이 뱉어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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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이라도

단 한 명이라도

‘혁명을 흉내 내던 요절’이라고 하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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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극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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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미친”(「엔딩극장」) 그는 끊임없이 ‘시를 쓰는 자신’을 의식하고 ‘자신의 시’를 검열한다. 그는 자신의 시 속에는 여전히 “‘악천후’가 떠돈다”(‘시인의 말’)고 털어놓는다. 뱉어 낸 문장마다 “우글거리는 흉문”(「빈집」)이나 “우글거리는 피비린내”가 그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로부터 부여받은 천형 덕분에 “내가 시가 되고//시가 나를 길들인 지점”에서 “시에 미친 놈”으로 살아가는 그는 “이 시대의 문법에 끝내 나는 맞지 않는”(「찰나의 발견」)다는 사실을 토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떠도는 문장의 살덩어리”를 뱉어 시를 짓는다. 세상의 가장자리를 더듬어 또 다른 아웃사이더(「점촌빌라 103호」의 “청승과 함께 잘도 늙는” 복순 씨, 「꽃과 노인」의 “혼자 죽은” 노인 등)들을 보듬기 위해. 더는 발붙일 곳 없는 그들을 더욱 가장자리로 밀어 내는 어떤 힘에 저항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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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의 시선은 중심에 편입되지 못하고 주변으로 흘러온 존재자들에 대한 가없는 관심과 연민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우리 시대의 주류 권력이나 자본 논리에 대한 시인의 시적 대항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점에서 버려진 존재자들을 옹호하는 인식은 그의 시를 떠받치고 있는 가치의 원천이라 할 것이다.

―해설, 「아웃사이더가 발화하는 존재론적 외곽성의 시」 부분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통조림
물고기인간
압정의 날들
위로 떨어지는 사람
검은 우산
객관성
단지 조금씩 때때로
은둔자
포비아(Phobia)
세 번째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
수명 다한 형광등을 위한 노래
엔딩극장
찰나의 발견
선언
크레이터푸시

2부
시작법(詩作法)
얼음 위를 걸어 간
기념일
사랑과 악천후는 이질일까 동질일까
달아나는 레슨
용도 변경
안개와 광장
꽃과 노인
우호적인 사명감
빈집
골목b
동안거(冬安居)
망치에 대한 유순한 증언
회색 감정
입술의 방식
냉장고의 재발견

3부
피크닉
발작
통보의 날들
슬럼프
동반
여론조사
근린
완벽주의자
졸업반
​도시형 늑대
복도
​레시피
루저백서 1
​루저백서 2
가건물
수직 그리고 수평

4부
일주일째 카레
풀타임
점촌빌라 103호
선데이 서울, 2019
아웃사이더
밑그림
투명
엄살선언문 1
엄살선언문 2
관계망상 1
관계망상 2
동시성
이벤트1
새벽을 물어뜯는 개
도미노
흑맥주의 밤

해설 |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웃사이더가 발화하는 존재론적 외곽성의 시

작가

하린 지음

2008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을 출간했다.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첫 시집으로 2011년 <청마문학상> 신인상을, 두 번째 시집으로 제1회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과 2016년 <한국해양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시클』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되었고 2013년, 2018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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