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산책

윤진화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9년 11월 18일 | ISBN 9788983927835

사양 124x198 · 144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29 | 분야 시집

책소개

야생의 사냥꾼 대신 산책자로 나타난

윤진화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집을 기다렸다. 2005년 『세계일보』 당선작 「모녀의 저녁식사」도 인상적이었지만, 2011년 첫 선을 보인 시집 『우리의 야생 소녀』에서 그려냈던 강렬하고 원초적인 세계는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고, 뜨문뜨문 그의 시를 접하게 된 독자들은 갈증의 한계에 이르렀다. 독자만이 아니라 시인 스스로도 갈증처럼 원했던 시집, 윤진화 시인은 이제야 첫 시집의 황야에서 성큼 걸어 나와 또다시 이상한 나라의 골목 어귀에 서 있다.

첫 시집을 출간하면서 사람들은 그를 ‘야생 소녀’라 불렀다. “허리춤에 사냥한 매를 단단히 꿰”(「초경(初經)」)고 황야를 누비며 뭇 목숨들의 피 냄새를 맡던 존재. 윤진화 시인의 모습이다. 언제 어디에서 침투할지 모를 외부의 공격에 맞서 기민한 촉수를 세운 채 살아야만 했던 그 야생 소녀는 “어떤 공격성과 예기치 않은 고통에 민감”했으며, 그렇기에 어떤 “장식도 증식도 없는, 화장하지 않”(『우리의 야생 소녀』 소개문)은 얼굴로 길을 나서곤 했다. 그런 그가 여전히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둥둥둥 북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울리던 황야의 한복판을 떠나 기이한 기운이 감도는 이상한 나라의 골목 앞에 선 그의 모습은 여전히 민낯인데도 어딘가 낯설다. 활과 창으로 무장하지 않은 까닭일까. 그는 더 이상 사냥꾼의 행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그의 낯빛, 표정, 손짓, 걸음의 속도와 리듬이 달라져 있다. 그리 바쁠 것 없이 뚜벅뚜벅 발을 내딛는 산책자의 모습처럼. 무엇이 이 맹렬한 야생 소녀를 이토록 침착하게 바꾸어 놓았을까? 그가 거니는 또 다른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민낯으로 이상한 나라의 골목을 거니는 그와 함께 『모두의 산책』을 떠나 보자.

 

 

지구라는 둥근 빵에서

 

아이스커피 들고

지구를 산책하고 있어요

– 감정을 갖고 천천히

안단테 에스프레시보

 

어제 없던 풀이 돋아나고

그제 없던 이가 내일 온대요

모레 꽃이 피고

다음 날 잊히는 것

 

지금 마시는 커피가 사라지고

작은 행성이 부서지려고 지구로 온대요

– 감정을 갖고 천천히

안단테 에스프레시보

 

죽은 친구가 보낸 편지를 읽고

태어날 아이를 떠올리는 것처럼

팔다리를 흔들어 보다

눈을 떴다 천천히 감는 것

 

– 수많은 어제 울어요

하나뿐인 오늘은 울지 않으려고

―「안단테 에스프레시보」 전문

 

시인이 “감정을 갖고 천천히” 거니는 이곳은 바로 “지구”다. 어느 동네의 공원이나 대도시의 빌딩숲과 같이 특정 장소를 거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무수한 행성 중 하나인 “지구”를 산책하는 것이다. 인간과 동식물이, 인간과 인간이 공존하는 이 지구에서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다르다. “어제 없던 풀이 돋아나고/그제 없던 이가 내일” 오며, “모레 꽃이 피고/다음 날에는 잊히”기도 하는 그런 지구다. 산책 중에 마시는 “커피가 사라지고” 나면 “작은 행성이 부서지려고 지구로 온”단다. 돌고 도는 지구 위에서 돋았던 풀은 시들고, 피었던 꽃도 다음 날 지고 만다. 컵 안 가득했던 커피가 조금씩 줄어 가는 동안 먼먼 곳에 존재하는 어느 행성은 죽음을 맞으러 지구로 온다. 그 와중에 그는 “죽은 친구가 보낸 편지를 읽”으며 “태어날 아이를 떠올”린다. 시인은 지구를 산책하며 그 모든 일을 ‘목격’하고 ‘감내’한다. 어제 태어난 무엇이 오늘을 살다 내일 죽음을 맞는 지구의 풍경. 야생 소녀로 살아 본 그이기에 이 서늘한 풍경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다.

 

다른 행성의 맛을 기다리는 동안

지구를 천천히 돌며

산책한다, 습도는 적당한가

빛의 양은 적절한가, 당신의 사랑은 가득한가

―「빵 굽는 섬」 부분

 

“습도와 염분을 알맞게 갖춘 바다” 덕분에 맛 좋아 보이는 ‘지구라는 빵’은 “태양 빛에” “부풀어 올”라 “적당히 둥근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신의 묘책”으로 “서서히” “자전”하며 “골고루” 구워진 이 지구를 시인은 “천천히 돌며/산책한”다. “신의 흰 거짓말”을 꿋꿋이 믿는 ‘빨강 머리 앤’(「지금은 슈퍼울트라맨과―빨강 머리 앤에게」)의 긍정성으로 계속해서 걸어 나가는 것이다. 그가 사냥을 멈추고 황야를 벗어나 ‘지구 산책자’로 길을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멀쩡해 보여도”, “튼튼해 보여도/전쟁은 계속되었”기에 “쉬고 싶어”(「두손의수」)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그뿐일까? 아니, 그보다 더 명확한 이유가 있다. “희로애락생로병사길흉화복흥망성쇠/모두 단조로” 흐르는 숱한 사연들 속에서 “징조와 증후를 읽”는 것이 “시인의 몫”(「손금을 풀다」)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시집 면면에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묻어난다. 때로는 “시인이란 꼬리를 치마 속에 감추고/무덤으로 들어”(「매장」)가기도 하지만, 자신의 본질은 ‘시인’이란 걸 알아 버린 그는 ‘사냥꾼’이 아닌 ‘산책자’로서 지구의 모든 “징조와 증후를 읽”어 나간다. 지상 모든 존재들의 “길흉화복을 점치고 카타르시스를 주듯 시인 또한 언어를 통해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대신 노래하며 정화”(해설, 「공수와 독백, 앤과 앨리스의 주술성」)하기 위해 말이다. “부국해양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건 ‘남영동 대공분실’의 소장님께 편지를 보내 “아가미 호흡 실험”(「부국해양연구소장님께」)의 진상을 밝히려 한 것이나, “타워 크레인에 올라 있던/해고 노동자”(「인생무한다면체 그리고 소외 효과」)의 추락사를 진술한 것도 모두 그러한 까닭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이 어쩔 수 없는 천성을 거부하지 못해 시인은 오늘도 “시가 되어 짖는다”(「천형(天刑)」).

 

 

이상한 나라의 골목에 자리한 그림자 극장으로의 초대

 

걷고 걸으며 지구를 산책하던 시인은 어느 “이상한 나라의 골목”에 닿는다. 한때 용맹한 ‘야생 소녀’였던 그도 이 낯설고 기이한 장소 앞에서는 머뭇하게 되기 마련. 시인은 그 자리에 머물러 “앞서 걷던 아이”를 본다. “저 앞에 길이 있다며/모퉁이를 잡고 사라”진 그 아이는 시인과 “꼭 닮”아 있다. “산책 길에 그만 아이를 잃”었지만 그 “골목”을 통과한 뒤 다시 자신을 “향해 이리 오라고/어서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그 아이를 발견한다. 그런데 “저기 저만치/또 다른 아이가 손을 흔”든다. 이 기묘한 광경,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의 한 장면 같다. “나이 많은 내가 나이 어린 나를” 보는 “이상한 나라의 봄”을 경험하며 “낡은 계단” 앞에서 몸이 “늘었다 줄었다”(「이상한 나라의 골목」) 하는 동안 시인은 과거와 현재를 무수히 오간다. 그러나 계절은 “아직도//봄”(‘시인의 말’). 시인은 ‘봄’이 계속되는 “이상한 나라의 골목”에서 “낡은 계단”을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1.

잃어버린 계단이 돌아왔다

어디 다녀왔니

분명 마흔다섯 개였는데…

어디 있었어

계단 하나가 옆구리에 박혀 있다

 

(…)

 

5.

진화는

참꽃이 아니라 늙으면서 변한다는 뜻,

계단이 잘 자랐다

무릎에 박혀 자라고

손등에 내려 자라고

―「계단의 진화」 부분

 

“마흔다섯 개”의 ‘나이’로 상정되기도 하는 “계단”은 그동안 무던히도 오르내린 까닭에 닳아지고 낡아 있다. 시인에게 “계단”은 세월을 지나며 한 장 한 장 구워 낸 벽돌 같은 것. “무릎에 박”히거나 “손등에 내려” “잘 자”(「계단의 진화」)란 계단을 딛고 시인은 “이상한 나라의 골목” 저 너머로 나아간다. 누추하고 후미진 골목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그 풍경에 비낀 “희로애락생로병사길흉화복흥망성쇠”를 노래하기 위해. 사랑(「여우애사」), 결혼(「결혼」), 출산(「출산 예정일―산부인과에서 1」), 죽음(「다시 또다시」)으로 이어지는 모든 존재들의 생애를 “공수”와 “독백”(해설, 「공수와 독백, 앤과 앨리스의 주술성」)으로 대변하기 위해. “해와 달이 하루 딱 한 번 만나는 시간//그림자 극장의 서막이 열”리는 가운데 시인은 “불콰한 두 그리움”의 접점 속에서 담담한 독백으로 “주인공 아닌 주인공”들을 “초대”(「초대」)한다. 연극은, 그렇게 시작된다.

 

윤진화의 독백극식 시들은 만신의 풍모를 갖춰 간다 해도 부족하지 않을 듯하다. 개인을 넘어 사회의 소외된 곳의 말들을 대신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윤진화의 독백극은 시적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을 드러냄으로써 공감하거나 비틀기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낸다.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정확하게 또는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독백극의 특성을 차용하는 방식을 취한 셈이다.

―해설, 「공수와 독백, 앤과 앨리스의 주술성」 부분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나의 가장 처음 지닌 것
비 내리는 연못
도마뱀
검객
마우스를 긁으며
그때 죽은 고양이, 설마
어머니 빵집―제주도에서
고양이 하지
여우애사
나쁜 꿈에서 벌떡 일어나듯
또 당신
각개전투 미신사전
천형(天刑)에게
계단의 진화
생일―산후조리원에서 2
오빠·41
비와 무덤과 창살 아래
간절기를 지나는 지하철
나의 알흠답고 신비한
지금은 슈퍼울트라맨과―빨강 머리 앤에게
명랑한 구구단
다시 또다시
출산 예정일―산부인과에서 1
바라건대
벌거벗은 여자가
요강
기차를 탔다
손금을 풀다
유서(宥恕)
모란
사과와 아이와

2부
안단테 에스프레시보
안녕하세요, 하나님
파두(Fado)
젊은 치매
뜬금없이 소나기
신입 사원
매장
부국해양연구소장님께
신이 다니는 길
안개꽃
두손의수
어디만큼 왔니―산후조리원에서 1
서부의 총잡이
결혼
부자 사용법
보도블록 밑으로 바다가 흐른다
송내
다시, 시다
인생무한다면체 그리고 소외 효과
플라워# 해방
불면증
죽음의 형식
이상한 나라의 골목
초대
뱀―산부인과에서 2
야구가 최고야
빵 굽는 섬

해설 | 최광임(시인)
공수와 독백, 앤과 앨리스의 주술성

작가

윤진화 지음

200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우리의 야생소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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