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뒤편

정찬일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20년 4월 10일 | ISBN 9788983928153

사양 124x198 · 212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33 | 분야 시집

책소개

에덴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산책자

4·3을 품은 시인 정찬일의 세 번째 시집

 

바람 이는 어느 밤, 들리지 않는 神의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기 그림자를 쫓는 한 사내가 있다. 그의 존재를 잊은 神이 산책하는 시간, 그는 ‘나’라는 참된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경계를 흩으며 위배와 균열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모호하고 어룽져 있지만 어쩌면 가장 ‘진실’에 가까운 실체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을 일컬어 “보이는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그림자에 몰두하는 실존”(『시인수첩』 2020 봄호, 『詩사회』 중에서)이라고 말한다. 인과에 매여 있었던 일상의 그물을 걷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그림자’ 혹은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쫓아 ‘에덴’의 경계를 서성이는 산책자, 정찬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연애의 뒤편』이 〈시인수첩 시인선〉 서른세 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1998년 『현대문학』에 ‘시’가,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시인으로, 소설가로 문단에 선 뒤 운문과 산문을 아우르며 작가의 길을 충실히 걸어온 그는 소설 「꽃잎」으로 2002년 제2회 〈평사리문학대상〉을 받았으며, 시 「취우(翠雨)」로 2018년 제6회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정찬일 시인이 탐색해 온 그림자는 기실 ‘시대의 그림자’인바, 유년 시절 이후 줄곧 제주에 깃들어 살아온 그는 제주의 아린 상처를 간직한 4·3 항쟁의 흔적들을 더듬어 그림자에 어린 진실을 밝혀 내는 일에 시인으로서의 인생을 걸었다. “4·3으로 잃어버린 마을 ‘삼밧구석’의 슬픔과 아픔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한편 치유의 과정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평을 받은 당선 시 「취우(翠雨)」는 계절마다 시간마다, 수십번씩 삼밧구석을 찾아가 그 터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골똘히 들여다보며 침잠한 끝에 건져 올린 작품이다. 시리고 아린 4월의 봄, “시적 성취와 함께 치유의 덕목을 고루 갖”춘 그의 시편들을 더듬으며 바람과 울음, 그 소리에 비낀 4·3의 슬픔 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 보자.

 

 

정찬일의 에덴, 그 뒤편에는

 

정찬일 시인에게 ‘에덴’은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는 세계”다. 또렷한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우리’처럼 속박이 전제된 곳인 셈이다. 따라서 그에게 에덴은 벗어나야만 하는 세계다. 그러한 까닭에 시인 정찬일은 에덴의 경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거추장스러운 에덴의 옷을 벗고 선악과를 따 먹는 위배와 균열”을 감행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에덴의 뒤편은 어떤 세계이며,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팽나무 빈 가지 끝에 매달린 0그램의 그림자들,

창백한 그 문장을 읽는다.

 

피 묻은 배내옷

씻긴 한 톨의 흰 밥알

첫서리의 예감

아직은 종달새 노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저 적요의 눈물 덩어리

 

오래전으로부터 눈먼 밤의 폭우를 뚫고

도착한 바람과 겨울 햇볕의 연대를

제 몸에 깊게 새겨 넣은 무등이왓 팽나무 경전,

생일 케이크에 꽂힌 촛불 끄듯

함부로 읽지 않는다.

함부로 베껴 쓰지 않는다.

 

내 이름에 곧 다다를,

멀리서 또다시 오는 햇볕이 깊다.

―「연대(連帶)」 부분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는 세계 너머, 곧 에덴의 뒤편에는 ‘연대’하는 세계가 있다. “오래전으로부터 눈먼 밤의 폭우를 뚫고 도착한 바람과 겨울 햇볕의 연대”가 이루어지는 세계. “함부로 읽”을 수도 “함부로 베껴” 쓸 수도 없는 장엄한 세계가 그가 서성이는 에덴의 경계 너머에 있다. 그 세계에 닿기 위해 시인은 “습관처럼 지나치던 오래된 팽나무를 에덴 밖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연이 속살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러고 있노라면 어느덧 늙은 나무 한 그루 “제 몸에 깊게 새겨 넣은 무등이왓 팽나무 경전” 되어 그에게 닿는다. 에덴 뒤편에서 그는 그렇게 한없이 망연(茫然)해진다.

 

 

4·3의 상처를 품은 나무가 되어

 

『연애의 뒤편』의 시편들 가운데 상당수는 ‘제주’를 담고 있다. 그냥 지명으로서의 제주가 아닌 ‘4월의 제주’ 아니 ‘4·3의 제주’다. 이는 큰넓궤, 무등이왓, 삼밧구석 등과 같은 장소를 통해 생생히 재생된다. “누가 카인의 증표를 그 손에 쥐여 주었나/총부리 겨누고 방아쇠 당기고 사람들 등에 잉걸불 던졌던 사람들/이름 한 자 적혀 있지 않은 몰자비(沒字碑)/겨울 하늘에 새겨진 아이들 이름 한 자 적혀 있지 않은/몰자비 위로 귀향하듯 닻을 내리는/동짓달 열이틀 저 달빛//허한 내 등에 닻 내린 겹겹의 달빛 또 기운다//떠올라라, 내일 다시 등 위로 떠올라라”(「무등이왓」). 서늘한 달빛 번지는 겨울 하늘에 선연히 떠오르는 이름 없는 사람들. 시인은 내일 다시 등 위로 떠오를 달빛 외면치 않고 끈질기게 노래한다.

 

오랫동안 4・3은 한국 사회에서 언급조차 불온시되었고, 그러한 현실에 맞서느라 4・3 소재 시편들은 참상의 고발・증언에 치중해 왔던 경향이 있다. 금기가 풀리면서 4・3을 다루는 시작법이 여러 갈래로 모색되고 있는바, 정찬일은 전면화시킨 자연 가운데 4・3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제 길을 내고 있음이 이로써 증명된다.

―해설, 「전회(轉回)의 시학」 부분

 

이처럼 정찬일 시인은 ‘자연’ 속에 4·3의 아픔을 녹여 낸다. 자연이야말로 생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음을 알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시인은 집요하리만큼 ‘나무’에 몰두하고, 자신 또한 ‘나무’가 되기 위해 깊이 뿌리를 내린다. “제 그림자를 오래 들여다볼 때 뿌리 깊은 밤은 열린다”(「연애의 뒤편」)고 진술한 것도 그러한 맥락일 것이다. “한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에 더욱 깊숙이 뿌리를 드리울 수밖에 없는 나무의 숙명으로 인하여 내면의 어둠은 차곡히 쌓여 갈 테지만, “그 어둠을 자양분으로 나무는 상처 앓는 이들의 그림자까지 감싸 안을 수 있”(해설, 「전회(轉回)의 시학」)음을 시인은 굳건히도 믿는 것이다.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 물의 얼굴, 사람의 얼굴
큰넓궤 겨울 볕뉘
겨울 궤
하이, 카를 마르크스 씨!
벌써 입동
물의 얼굴, 사람의 얼굴
도엣궤
폭낭
숨비나리
취우(翠雨)
무등이왓
거슬러 올라 닿는 침묵들
겨울 문장
연대(連帶)
봄, 무등이왓

2부 | 태풍을 대하다
江汀, 가다-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들
연애의 뒤편
8월의 목련 아래에는
섯알오름의 새비
전향의 서(序)
신발
오름에 새겨 넣은 문장
지박령(地縛靈)-시린 사랑
비켜 가지 않고 바로 가는 강정(江汀)
태풍을 대하다
환한, 나무의 밑동
흐린 저녁이 도착하기까지
4월 3일, 저물 무렵
사계(四季)

3부 | 풋사과의 내력
그림자가 묽어지는 시간
나무-나-페르난두 페소아에게 띄우는 슬픈 신호
혼야(昏夜)
봄날
풋사과의 내력
말에 치인 날은 흐리다
나무의 귀
반야(半夜)
창가
유리(遊離)의 배후
길 잘 찾아가는 법
봄 춘(春) 붉을 단(丹)
뒤척였으므로 찾아오는
꽃 독법에 대한 조언
나무
Sweet cat이라고?
낮달, 불립문자(不立文字)

4부 | 각주(脚註)로 가득한 날들
고어(古語)를 읽는 밤-각주(脚註)로 가득한 날들
빈방
눈물의 근원-각주(脚註)로 가득한 날들

엉겅퀴-각주(脚註)로 가득한 날들
틈이 내뱉은 단편들-각주(脚註)로 가득한 날들
투명에 대한 명상-각주(脚註)로 가득한 날들
어떤 신호
골목을 빠져나온 바람
통화-각주(脚註)로 가득한 날들
날것들, 속내가 불편치 않다
내 이야기를 하는 이유
木蓮 곁 바람처럼
八月-각주(脚註)로 가득한 날들
서술의 밤
겨울 낙관(落款)

해설 | 홍기돈(문학평론가・가톨릭대학교 교수)
전회(轉回)의 시학-무(無)를 근거로 삼는 자기 구원의 도정

작가

정찬일 지음

1964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문학』에 시로,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했다. 2002년 제2회 <평사리문학대상> 소설 부문, 2018년 제6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시집 『죽음은 가볍다』, 『가시의 사회학(社會學)』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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