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강백수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20년 8월 10일 | ISBN 9788983928283

사양 124x198 · 176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37 | 분야 시집

책소개

부조리한 세계를 살아가게 만드는 웃픔의 미학

강백수의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시인이면서 싱어송라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는 ‘문학과 음악의 요정’ 강백수의 첫 번째 시집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이 ‘시인수첩 시인선’의 서른일곱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동안 몇 장의 음악 앨범과 『사축일기』 등의 에세이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을’들의 이야기를 풀어내어 큰 공감을 받았던 강백수가 이번에는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디스토피아 속 청년들의 좌절감과 박탈감을 시에 담았다. 시집에 그려진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폭력에는 시인 특유의 유머가 덧입혀 있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이병철은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강백수의 시들을 블랙코미디의 귀환이라 명명한다.

 

 

디스토피아에 덧입혀진 블랙 유머

 

시인의 첫 시집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밑바닥’의 세계는 현재의 비극과 암울한 미래로 인해 디스토피아로 보이지만, 시인은 이 디스토피아에 유머를 입힌다. 시집의 맨 마지막 작품인 「안녕히」라는 시에는 이러한 블랙 유머, 즉 ‘웃픔’이 잘 드러나 있다.

(……)

잠이 들고 싶었던 그는 자살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은행 영업시간이 되자마자 그는 적금을 깼다

그렇게 아등바등 모은 게 씨발 겨우 이천이라고?

갖고 싶던 롤렉스 시계를 샀고

중고차 시장에 가서 2010년식 쿠페를 한 대 뽑았다

엽서를 사서 고마웠던 이들, 미안했던 이들에게 유언을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

이래저래 신세를 많이 지고 살았나 보다, 다 적고 나니 해가 졌다

가장 친한 친구 놈들을 불러 가라오케에 갔다

좋아하는 노래를 잔뜩 부르고, 비싼 술을 마시고 계산을 하고

호텔방을 잡았다

그래 꽤 괜찮은 마지막 날이었어

그는 준비해 둔 수면제 수십 알을 털어 넣고

잠이

들었

그리고 너무나도 개운하게 기상하여

정말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새로 태어난 듯 기상하여

호텔 조식을 먹고 체크아웃을 하고

아홉시에 맞추어 우체국으로 내달렸다

부디 엽서들이 아직 발송되지 않았길 바라며

―「안녕히」 부분

 

시 속 화자는 비극적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자살을 결심하고 죽기 전에 전 재산을 탕진한다. 명품 시계와 외제 차를 사고 비싼 술을 마시며 마지막 날을 흥청망청 보낸 ‘그’는 준비해 간 수면제 수십 알을 먹고 호텔방에서 잠이 들지만 다음 날 아침 “정말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새로 태어난 듯 기상”한다. 이 지점에서 독자들은 안도와 연민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애처롭긴 한데 웃기고, 그렇다고 마냥 웃을 수도 없는 ‘웃픔’에 직면하는 것이다.

「18cm」라는 시에서 화자는 학창 시절 “18센티”나 되는 성기를 자랑하던 동창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만, 현재 그 동창이 “40시간을 굶”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자 “인터넷 뱅킹으로 만원을 부”치면서 냉소한다. “통장에 잔고는 넉넉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네겐/위대한/18센티의/자지가 있잖아”.

강백수의 시는 연이은 절망적 사건들로 인해 비극에 비극을 덧입히거나, 외부와 단절한 채 자기감정을 절대화하는 최근 우리 시의 경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특유의 블랙 유머를 선사한다. 이는 시인이 스스로 선택한 시적 전략이자, 자기 목소리를 가장 잘 낼 수 있는 위치를 현명하게 점유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시인 특유의 블랙 유머가 깃든 시들을 보면서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감지하고, 그 희화화한 비극의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강백수의 시가 단순히 희화화된 비극과 냉소로만 점철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세계의 부조리함과 대비시키기 위해 시인은 잃어버린 것들을 꾸준히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엄마가 커피 자판기에서 뽑아 준 ‘율무차 한 잔’(「율무차」), 로봇 개와 비교되는 늙은 개 ‘삼돌이’(「개 등에도 저승꽃이 피나요」), “광화문과 김포 사이”를 오가던 ‘9602번 버스’(「9602」) 등을 통해 시인은 지금 잃어버린 것들을 소환한다.

 

 

세상이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시집의 해설에서 이병철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시옹(Abjection)’ 개념을 빌려, 금융자본주의 사회의 풍요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을, ‘상징계가 요구하는 올바른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지고 경계 밖으로 추방된 것들’인 ‘아브젝트(Abject)’에 비유한다. 사회공동체를 하나의 육체로 가정했을 때, 성장과 발육을 위해 분리되고 추방되는 이질적이고 불편한 것들, 즉 각질, 손톱, 발톱, 머리카락, 대변 같은 것들이 아브젝트에 해당한다. 강백수의 시에는 이 ‘아브젝트’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

266-6

두 층짜리 낮은 건물

반지하에 관짝 같은 원룸들이 드글거리고

위층은 건물주 영감 내외가 통으로 쓴다

밑에서 올라오는 지독한 삶의 냄새를 견디다 못한

건물주 영감은 세입자들에게 몇십만원씩을 쥐여 주고

올봄에 건물을 새로 올릴 예정이니 나가 달라고 말했다

자욱하게 모여 있던 분노들은 또 어디로 흩어져 갈 것인가

어느 눅눅한 지하에서 또 다른 분노들을 만나 도사리고 있을 작정인가

―「266-6」 부분

 

“건물주 영감”에게 “지독한 삶의 냄새”를 풍기는 세입자들은 곧 추방해야 할 ‘아브젝트’다. 「세입자와 세입자의 세입자」라는 시에는 친구가 부모의 도움으로 얻은 월셋방에 세 들어 사는 화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시에서 화자는 친구가 여자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는 날엔 꼼짝없이 작은방에 갇혀 있으면서 “이 집의 불청객은 여자인가 나인가”를 고민한다. 금융자본주의의 계층구조를 이미지화한 이러한 시들은 영화 〈기생충〉과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양극화와 청년 세대의 절망이 극에 달한 오늘날의 디스토피아에서 강백수는 개성적인 목소리로 한국 사회를 증언하면서 기성세대를 향해 일갈한다. “전쟁 얘기 잘나갔던 얘기 좆 같은 얘기 세상 절단 나는 얘기”(「게이트웨이」) 집어치우라고. 당신들이 뭐라고 하든 “장대하게 도래할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서/얘랑 나랑은 그냥 깍두기 하면 안 될까요?”(「한파주의보」)라는 말도 덧붙인다. 기성세대의 이데올로기를 수억 광년 전에 소멸한 별들의 잔상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날 하늘에 떠 있던 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 버린 별들의 유서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했다

먼 옛날 먼 바다에 누가 빠져 죽을 때 태어난 파도가

그제야 발치에 닿기 시작했다

너는 뭐라 말을 하는데 도무지 들리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했다

서로 등을 돌린 채 잠이 들었던 밤에

진작에 닿았어야 했을 말들은 여정을 떠났다

(……)

한참을 멍하다가 한 시절이 지나다가

그제야 나는 문득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시각 먼 바다에는 또 누가 빠져 죽고

어느 별은 유서를 쓰고 있었다

―「레이턴시」 부분

“그날 하늘에 떠 있던 건/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 버린 별들의 유서”에 불과하다는 시구처럼, 강백수는 젊은 세대에게 지금의 절망은 너희 잘못이 아니고 곧 사라질 허깨비에 불과하니, 세상이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하”자고 말하는 듯하다.

강백수는 우리와 무관한 어제로부터 비롯된 오늘의 우울과 학습된 패배감에 함몰되는 대신 너와 나, 우리,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면서 키스를 하자고, 주어진 순간들을 그저 살아 내자고 북돋우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젊음은 아직 불붙지 않은 장작이라서, 그는 “타지 않은 것들을 다시 모아다가 불을 붙인”다. “어떤 것들은 이번에야말로 활활 타오를 것이고/어떤 것들은 기어이 이번에도 살아남을 것”(「모든 것은 조작되었다」)을 끝까지 믿으면서 말이다. -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266-6
핵폭탄과 가슴에 대한 새로운 견해
중고나라
세입자와 세입자의 세입자
씨유
호호호
게이트웨이
보혈
도미토리
와일드 사파리
공황
멕시코에서 만난 여자
뱀이다
휴대폰 공습
심야영화
저스티쓰

2부
10동
바보는 다 안다
18cm
유기
율무차
커피와 소주
새 양말을 신었어야 했다
발인
개 등에도 저승꽃이 피나요

3부
프로필사진의 해부학
아메.리카.노

9602
꿈속의 광장
매운 맛의 역설
담백한 나날들
쉐킷쉐킷
모든 것은 조작되었다
길치
레이턴시
고소공포증
한파주의보

4부
나는 행복합니다
가격 대 성능 비
굴비
출판기념회
은행 아가씨
폐기물 신고
우주영웅
즐거운 재택근무
마릴린 몬로
소시오패스
쌔-한
피터팬의 좋은 방 구하기
가능성의 계절
소멸을 꿈꾸는 밤
안녕히

해설 | 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웃픔의 미학, 아브젝트들을 위하여

작가

강백수

1987년 울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2008년 『시와세계』로 등단했고 시인과 가수로 동시에 활동하며 ‘문학과 음악의 요정’이라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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