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자 발표

계간 『시인수첩』이 올해로 여덟 번째 신인을 배출하였다. 김미소, 허주영. 이 두 사람이 그 주인공이다. 올해 <시인수첩 신인상>의 시 부문에는 총 335명이 응모하였으며 『시인수첩』 편집주간 김병호 교수(협성대학교), 문학평론가 최현식 교수(인하대학교)와 류신 교수(중앙대학교)께서 심사로 수고해 주셨다. 나날이 치열해지는 좁은 관문을 뚫고 신인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두 시인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각자의 시적 개성과 세계를 또렷이 드러내는 걸출함으로 반박의 여지없이 공동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심사총평 발췌

기본적으로 신인에게 요구되는 기준들을 세웠다. 그 첫 번째는 작품의 이미지나 메시지가 선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화려한 언술에 함몰되어 정작 시의 메시지가 흐려지고 시의 초점이 지워지는 경우를 경계하였고, 맥락 없는 무의미한 소비적 상상력도 엄격하게 배제하였다. 두 번째는 구체적 현실과 삶의 자리에서 비롯된 시들을 우호적으로 살폈다. 추상적 관념과 상투적 철학으로 점철되어 서툰 수수께끼와 같이 진정성이 희박한 작품들도 우선적으로 내려놓았다. 이렇게 하여 22명의 예심 통과작을 선별할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 통과 작품 중에서 최종심에서 다룰 작품의 응모자 3명을 각자 적어 오기로 하였는데, 세 사람이 모두 추천한 응모자가 1명, 심사위원 두 사람이 공통되게 추천한 이가 4명이어서, 이들 5명을 최종심에서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막판까지 치열하게 논의의 대상이 된 두 응모자를 공동 수상자로 선정하기로 하였다.

 

 


8회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 김미소

 

1989년 충청남도 서산 출생.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kmiso89@daum.net

다정한 돼지 외 4편

 

그건 이미 지나간 구름, 감정 없는 인간을 고기라고 부르자, 다정한 가족을 해체하고 싶다 정숙하지 않은 기분을 숙성시켜야지, 가끔은 냉동고 속 근황을 살핀다 돼지들은 잘 있습니까 아무쪼록 변질되지 않는다 돼지는 돼지일 텐데, 냉동고 틈 사이로 흐르는 핏물은 왜 흥건해지는 걸까 바닥이 고이는 건 왜 도축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피를 흘리잖아, 틈을 노리잖아 이건 냉동고 옆 망초꽃이 어른이 되어도 밥을 굶어도 키가 자꾸만 자라는 것과 같은 일, 죽어서도 등급을 얻습니까 어른이 된 것 같았는데, 완성된 인격인 줄 알았는데……. 변이된 돼지입니까 돼지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답한다 꿀꿀, 그래, 진화하는 돼지가 돼야지, 회피하는 창문과 문밖의 사정, 누군가 고기를 굽는지 연기가 피어오르는 금요일 화목한 돼지들은 사려 깊은 저녁을 품고 사니까, 그걸 행복이라 말하면 눈이 따갑다 돼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돼지와 나의 그림자가 겹친다 두 손으로 표정을 움켜쥐며 걸어 들어간다 전원이 꺼진 냉동고로.

 

김미소 집중 심사평 발췌

김미소의 시는 공격적이면서도 서정적이고, 실험적이면서도 전통적이며, 거침없지만 진중하고, 차갑지만 따뜻하다. ‘화목’이라는 가족 신화 이데올로기를 잔인하게 해체한 「다정한 돼지」와 인간 문명의 탐욕으로 도살 처분된 오리들의 홀로코스트를 신랄하게 풍자한 「버그」는 조지 오웰의 우화 『동물농장』의 현대판 시적 버전으로 읽힌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꿰뚫는 김미소의 예리한 눈이 듬직해 보였다. 한편 영국의 탐미주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묘비명을 자신의 시적 맥락 속으로 차용하거나, 기성 시인의 시구를 인용하는 모습에선 상호 텍스트성을 실험하는 과감함도 엿보였다. 또한 단문을 스타카토식으로 배열해 언어의 리듬감을 살리는 재능도 돋보였다. 그래서 김미소의 시는 속도감 있게 읽힌다. 하지만 시를 완독하고 나면 묘한 여운이 길게 남는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시의 본령인 뜨거운 서정이 “전원이 꺼진 냉동고”와 같은 김미소 시 세계에 으밀아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8회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 허주영

 

몰아쉬는 언덕 외 4편

1990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어교육과 졸업 및 동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juhawww@gmail.com

 

나는 팔을 잘라 사과나무 옆에 심었다

가지가 움터 올 때마다 양쪽 모두 기우뚱거렸지만

막다른 곳에서 숨이 찰 땐 끝을 멈추고

몇 잎의 새벽을 몰아쉴 수 있었다

 

사다리에 걸린 석양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면

어떻게든 그 언덕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나를 끌고 팔을 심은 곳이 어디냐 다그쳤다

인중과 미간이 엄격하게 구겨지고

다시 펴지는 것을 반복했다

그 틈에서 불안이 뻗어 올랐다

 

사과는 뒤통수를 돌아 승모근으로 흐느꼈지만

향기만 들릴 뿐이었다

 

숨죽인 햇살이 저벅저벅 몇 바퀴 맴돌다 돌아갔다

사과나무는 나보다 더 자라나 그늘을 만들었다

나는 사과나무가 들여놓은 평원에서

축구를 해야 하고 싸움을 해야 한다

올 가을에는 나무에 사과가 너무 많구나

 

낮잠을 자는 나른한 오후를 나무에 걸고 싶다

그러나 내 것이 아닌 몸의 기억이 나를 채우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가 필사적으로 점령해 온다

울림의 테두리에서 점점 부푸는 사과들,

 

나는 바닥 위로 팔을 뻗어 낙과 한 알

움켜쥐었다

 

허주영 집중 심사평 발췌

허주영은 일상에서 느끼는 멜랑콜리, 권태, 고독, 불안 등과 같은 감정을 감각적인 언어로 포착해 독특한 시적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인다. 특히 후각과 청각(“향기만 들릴 뿐이었다”), 시각과 청각(“오렌지빛 해가 난간 옆으로 막 굴러갈 때였습니다”), 촉각과 시각(“창틀을 긁고 가는 별똥별”)이 결합된 공감각적 표현과 사물을 의인화하는 솜씨(“숨죽인 햇살이 저벅저벅 몇 바퀴 맴돌다 돌아갔다”, “괘종시계는 잿빛의 초침으로 팔을 벌렸다”)에서 시작詩作의 기본기가 탄탄함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수사 속에 시적 진실을 가두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연마된 언어 감각이 직조한 매혹적인 이미지를 통해 일상의 ‘평범한’ 감정을 문학적으로 ‘비범하게’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른바 ‘범속한 트임’의 순간을 기민하게 포착한 성과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난해한 이론의 갑옷을 입거나 전위적인 창검으로 도발하지 않고서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 허주영 시의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