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시인수첩 신인상〉 발표

제9회 〈시인수첩 신인상〉에 유은고, 조은영 시인이 공동 당선되면서, 어느새 ‘시인수첩’의 이름으로 열다섯 명의 시인을 내보내게 되었다. 올해 〈시인수첩 신인상〉 심사위원으로는 유성호 교수와 김병호 시인께서 수고해 주셨다. 앞으로도 유은고, 조은영 시인이 고유의 필력과 개성적 시세계로 우리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줄 것을 기대한다.

 

예심 총평

축제이면서 모험이기도 한 설렘

김병호(시인, 『시인수첩』 주간)

 

<시인수첩신인상>은 계간 『시인수첩』의 역할 중 가장 설레고 귀한 역할로 여겨진다. 한 명의 시인을 시인수첩의 이름으로 우리 시단에 내놓는 일은, 우리 시문학사의 지평을 넓히고 우리 시에 새로운 에너지와 가능성을 부여하는 의미와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축제이며 모험이기도 한 신인상 심사가, 심사자로서 응모자 못지않게 설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년까지 매년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던 응모자 수가 올해는 다소 주춤하였다. 우리 사회 전반에 미치고 있는 코로나19 영향을 문학판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예심의 과정은 그 어느 때보다 오히려 치열하였다. 응모작의 허수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응모작 전체를 더욱 촘촘하게 읽을 수 있었다. 시적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습작 수준의 작품이나,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이를 독자에게 강요하는 작품, 산문시를 핑계로 시의 내재적 조건들을 무시한 작품, 낯익고 고루한 비유와 상징으로 외화에만 힘쓴 작품, 시단의 유행을 지나치게 좇아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자기 토대 없이 허술하게 구축한 작품, 삶과 언어에 대한 근본적 경외가 없는 작품들을 우선으로 예심에서 지워 나갔다.

작품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할 수 있었다. 언어의 긴장과 패기를 조절하면서 언어적 개성을 추구하는 작품과 일상의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독자에게 실질적 감동을 주고자 하는 작품이었다.

예심은 이 중에서도 시인의 개성적 시선과 감각, 사유를 통해 시적 대상을 형상화하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거나 자기 문장의 힘으로 효율적으로 언어를 운용하면서 상상력의 내면화나 그 깊이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한 작품들을 눈여겨보았다. 그 결과 본심에 올려 집중적으로 살펴볼 작품들을 아래와 같이 추리게 되었다.

「너머의 수족관」 외 7편

「농담」 외 6편

「늦은 우기에게」 외 9편

「달의 궁전」 외 6편

「당신의 분절성」 외 4편

「방의 일상」 외 13편

「브리태니커」 외 4편

「석화」 외 4편

「스콘」 외 10편

「아내가 악기에 아이디어가 많다고 말했던가?」 외 4편

「첫 문장」 외 5편

「카메라 루시다」 외 10편

「너머의 수족관」 외 7편

 

집중 심사평

창작의 균질성과 다양한 화소話素의 면모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교수)

 

이번 제9회 『시인수첩』 신인상 공모에는 여러 분의 예비 시인이 응모작을 보내왔다. 성별과 세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많은 분들이 보여 준 큰 관심은, 이미 시단에 무게감 있는 신인을 다수 배출해 온 『시인수첩』에 이번에도 꽤 의미 있는 지표를 남기게 해 주었다.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응모작을 읽으면서 심사위원들은 주제 의식과 형상화 방법에서 남다른 개성적 성취를 보인 유은고 씨와 조은영 씨의 작품에 주목하였고, 더불어 이분들의 작품이 완결성과 참신성을 두루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여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유은고 씨의 작품은 균질성과 오랜 창작 이력을 암시해 준다. 「농담」은 세상을 향해 건네는 유쾌하고도 아픈 언어다. 소소한 일상의 미움과 사랑도, 사물의 이름도 누군가의 취향도 자세와 행위도 공포나 아름다움도 모두 확연한 인과율에 의해 분별되거나 배열되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전적으로 “아름다운 세계”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정성으로 가닿는 사랑의 기적은 가능할 것이라고 노래한다. 이름이 앵무새인 화자가 자신이 갇힌 새장과 저 넓은 세상을 같은 곳으로 치부했을 때 사랑과 미움도 구획을 버리고, 농담처럼, 기적처럼, 한 몸으로 결속해 간다. “아름다운 품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은”(「빙고」) 마음으로, “나에겐 부끄러움이 필요”(「염소와 수녀님」)하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이별은 먼저 도착하는 일”(「요요」)임을 발견하고 “범주를 잃었고 잃었다는 말은 혁명과”(「셀로판지」) 통한다는 엄연한 역리를 그녀는 처연하게 알고 있다. 그 점에서 유은고 씨는 사랑과 의심과 부끄러움과 용서와 이별의 서사를 시 안쪽에 가득 품은 시인이다. 자신만의 시적 의제로 키워 가기를 바란다.

조은영 씨의 작품은 패기에 가득한 점진적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작품마다 평면성보다는 입체적인 개성적 호흡이 느껴졌다. 「늦은 우기에는」은 삶과 죽음, 넘어짐과 옮겨 감, 가지와 뿌리, 상처와 기억을 후렴구처럼 소시락거리던 시간에 대한 회상이요 다짐이다. 이제 서로의 “다른 나라로 가는 나무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삶과 죽음과 옮겨 감을 나누는 늦은 우기에 화자는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뿌리째 연결음에 매달린 사람들”(「환절기」)의 이야기를 적어 간다. 그렇게 시인은 “맨발의 그림자가 왼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면”(「레르 데바가르Ler Devagar 서점에서 세 시에 만나요」) 세상을 묵직하게 딛고서 “옷이 젖으면 비치는 침묵”을 간직한 채 “오직 포옹의 문법만이 필요”(「파란 눈의 애인은 나를 벨라Bella라고 불렀다」)한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마침내 “등을 보며 간다는 것은 당신의 안녕을 묻는 일”(「수염이 자라는 밤」)이라는 것을 알아 가는 조은영 씨는 그 점에서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화소話素를 가진 풍부한 언어를 낱낱 작품으로 선명하게 보여 줄 것이다.

두 분은 저마다 고유한 필력을 자산으로 삼으면서 오랜 습작 시간을 깊숙이 품고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들인 점도 퍽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시를 써 가는 기율과 방법에서도 삶의 진정성과 이미지의 선명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시인수첩』이 택한 이번 결실이 우리 시단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기를 바란다. 당선을 축하드리면서, 더욱 다양하고도 단단한 안목과 기량을 길러 가기를, 신인다운 지속 가능성을 실물적으로 구현해 가기를 마음 깊이 기대해 마지않는다.

 

9시인수첩 신인상당선자: 유은고

농담 외 4편

앵무샙니다 생선 한 토막으로 나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랑해요 말할 수 있지만 알아볼 수는 없겠습니다 오늘은

거위 한 마리와 개암나무의 이름을 짓습니다 오늘도

당신도 다음도 내 성적 취향입니다 최대한의 인간적 자세와 행위를 가르칩니다 옥수수 알을 던지며

당신이 당신에게 가르치는 것은 의사소통 능력이 아니라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는 지구력이 되겠습니다

당신의 지구가 아름다워졌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구에서 떳떳하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생선 한 토막이나 정자 3억 개로는 호소력이 희박한 시대에 나는 인간만큼 신뢰할 동물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무서운 무기인데 이론은 아름답군요

아름다운 세계는 없겠습니다 옥수수 알이 물맛이 개암나무의 기적이 있겠습니다 하나의 기적을 이루려면 사랑할 사람이 꼭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미워할 사람이 없는 당신은

모르는 사람을 쓰다듬으며 앵무새를 앵무새로 만들어도 되겠습니다 다 말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먼저 꼬셨잖아요 그래요 새장과 세상이 같은 세계라서 나는 팬벨트나 돌리겠습니다

 

9시인수첩 신인상당선자: 조은영

늦은 우기에게 외 4편

발자국 소리에 기대지 않을 때 바라본 눈동자에 쉽게 넘어진다 눈이 오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뒤꿈치를 들고 속삭대며 눈뭉치처럼 몸을 굴렸다

썩은 나무를 올려다보며 당신은 줄기 이야기를 했고 나는 뿌리를 뻗어 다른 나라로 가는 나무 이야기를 했다 이건 살아 내고 있는 거야 아니 옮겨 가는 거야 죽어 가는 거야 후렴구처럼 소시락거린 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생기면 항상 끝을 생각해요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 기억이 흘러내릴까 당신의 곱슬머리를 쓰다듬는다 올해는 눈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부러진 가지 마디마다 손목을 그었다 여름이 오지도 않았는데

괜찮아? 복숭아는 눈을 감고 먹어야 해

상처 난 살갗을 곱씹지 않았다면 바다에서 발가벗고 수영을 했을지도 몰라

어쩌면 다음 해 눈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불을 끄고 흘러내리는 과즙만을 다리 사이에 발랐더라면

자꾸만 커지는 외투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팔과 다리 투명해지는 몸통들

눈이 오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미끄러지다 결국 손깍지를 천천히 빼고 있다

하늘로 향한 다리를 파르르 떨며 몸을 뒤집는 딱정벌레

멈춰 있는 벌레의 움직임을 두 얼굴이 바라본다

우리는 다른 나라로 가는 나무 이야기를 한다 이건 죽어 가는 거야 아니 옮겨 가는 거야 살아 내고 있는 거야

천천히 목피가 벗겨진다 오랫동안 불을 끄고 뿌리를 뻗는다

왜 아직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