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만든 달

정영선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07년 9월 5일 | ISBN 9788983922519

사양 271쪽 | 가격 9,000원

분야 국내소설

책소개

죽은 자와 산 자가 소통하는 여성 수난사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작가 정영선의 두 번째 소설집 『실로 만든 달』이 (주)문학수첩에서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현재 우리 소설에 만연해 있는 현란한 포즈와 형이상학적 유희에서 벗어나 ‘영매’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과 삶의 성찰이라는 소설 본연의 소임에 충실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작가는 소설의 시간 구성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소설에서 진행되는 현재 시간은 길어야 나흘 정도에 불과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나흘 정도의 시간에 1919년과 2004년, 약 85년의 상거(相距)가 있는 두 시간대가 여러 차례 교직(交織)된다는 점이다. 귀신인 ‘관옥’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점은 1919년 어름이며, ‘정원’의 시간으로 돌아오면 2004년의 현재이다. 『실로 만든 달』은 시간적 관점이 왔다 갔다 할 때 생겨나는 여러 우려를 말끔히 잠재우고 어지럽고 복잡한 이야기를 매끄럽게 풀어낸다. 『실로 만든 달』은 ‘삶/죽음’ 혹은 ‘이승/저승’의 경계 구분이 독특하다는 점에서 다른 소설과의 차별성이 드러난다. 작가가 이런 방식을 취택한 근본적인 의도는 100년 가까운 시간을 두고 계속 이월·지속되는 어떤 ‘역사적 숙제’를 환기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역사적 숙제’인가. 80여 년 전, 1919년에 죽은 ‘관옥’과 2004년의 ‘정원’이 긴 시차를 사이에 두고 일정한 ‘상동성’으로 묶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두 여성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의 시대를 완강히 지배하고 있던 ‘가부장적 질서’ 또는 ‘남성 중심 사회’의 희생자들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80여 년간 되풀이된 여성의 고난과 한(恨)의 세계를

나흘 동안의 시간으로 교직한 페미니즘 소설

『실로 만든 달』은 초점 화자의 빈번한 이동이라는 또 다른 형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초점 화자를 자주 바꾼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근대소설의 서사 원리와는 다른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실로 만든 달』은 드러내 놓고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표방하는 것은 아니지만, 초점 화자의 이동을 통해 단일서술자에 의한 감각과 경험의 주관화를 피해 가려는 노력을 곳곳에서 보여 주고 있다. 그 덕분에, 독자는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이중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서술 시점의 분화가 곧바로 사태의 총체성을 인식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한 사건을 각기 다른 시각으로 서술함으로써 주관화의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부산의 심상지리, 혹은 식민지적 혼종 이 소설이 지닌 개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다채롭게 등장하는 ‘식민지적 혼종’에 관한 문제이다. 특히 소설의 무대가 되는 부산이라는 특정 장소의 역사적 형성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이 도시가 지닌 독특한 ‘심상지리’가 작가에 의해 묘파된다. 작가는 부산이라는 도시가 근대적 대도시로 형성되는 과정은 곧 식민지적 혼종의 형성 과정이기도 했음을 반복적으로 환기한다. 부산이 이런 맥락으로 묘사된 사례를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장소’들은, 그 ‘장소’와 관련된 일종의 심상지리를 만들어 낸다. 부산이 최초의 개항장이고, 이곳을 통해 무수한 박래품들, 특히 일본인, 일본 문화, 일본화된 서구 문물들이 흘러 들어온 것이 주지의 사실이지만, 부산이라는 특정한 장소를 묘사하면서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일종의 심상지리의 차원에서 환기한 소설들은 많지 않다. 『실로 만든 달』은 그 점에서 각별하다. 낮고 여린 목소리, 단성성(單聲性)의 세계 『실로 만든 달』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결코 흥분하는 법이 없다. 귀신과 산 사람이 소통하는 모티프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다가오는 가장 강한 느낌이 ‘서늘함’인 것은, 이 소설을 관류하는 서술의 톤(tone)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진정한 갈등을 발견하기 어렵다. 나타나는 모든 고통들은 각자의 심원한 내부에 고립된 채 침잠해 있다. 그것은 결코 밖으로 드러나서 외부의 그것들과 부딪히거나 습합되는 일이 없다. 소설이 시종일관 차분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도 이런 서술상의 특징 때문이다.

화려한 색채로 화폭을 가득 채운 서양화보다 몇 개의 선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나머지는 여백으로 비운 수묵화가 오히려 긴 여운을 남기듯이 『실로 만든 달』의 단성성은 그런 점에서 독자들에게 그림자 긴 여운을 남겨 준다. 애잔하고 쓸쓸한 기운은 바로 그 여운의 잔영 탓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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