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가 울까봐

황은주 지음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19년 1월 18일 | ISBN 9788983927330

사양 124x198 · 144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20 | 분야 시집

책소개

세계를 여는 몽상가의 정원으로의 초대

우주적 몽상을 체현하는 황은주의 첫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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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하나의 사과가 있다. 껍질로 감싸인 그 아삭한 과육이 무얼 빨아들이며 숙성했는지, 무슨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사각. 한 입 베어 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또한 알 수 없다. 다만 사과를 베어 문 이의 감각이 얼마만큼 열려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사과의 맛과 향을 음미하는 순간, 사과 너머의 시간과 공간으로, 아니 그 너머의 우주로 감각을 쏘아 올리는 사람이라면 분명 사과의 성분은 물론이요 근원까지도 감지할 수 있으리라.

한 알의 사과 같은 시가 가득 열린 한 권의 시집을 소개한다. “사유의 풋풋함과 상상력의 발랄함”으로 시적 내공을 주목받으며 등단한 황은주 시인의 첫 시집이다. 30대 후반, 뇌수막염을 앓던 시절에 처음 펜을 들었던 시인은 10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2013년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로 시적 수련의 내공을 드러내어 보이며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무릎 꿇고 엎드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며 “사람들에게 치유할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는 일념으로 펜촉을 벼려온 시인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대화하고 싶은 열망으로 시를 써왔다.

당선 이후 “황은주만의 색깔을 갖고 자신만의 시를 쓰고 싶”다는 의지를 밝힌 만큼, 과연 시인은 독보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여 시인만의 ‘정원’을 꾸렸다. 전영규 문학평론가는 이 시집을 이른바 ‘몽상가의 정원’이라 이름한다. 이 정원에 열린 시들은 하나같이 감각의 역동성을 요구한다. 베어 문 사과를 단번에 삼키지 않도록 의식을 붙잡아 두어 그 너머의 시공을 더듬게 할 뿐만 아니라 아득한 우주까지 감각을 뻗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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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고, 매혹되며 깨어나는 의식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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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언어가 고여 있는 의식을 가르며 단단한 관념을 뚫고 무한으로 나아간다. 생의 이미지들이 예고 없이 엄습하는 순간, 놀라고, 매혹되면서 의식의 각성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멈춰 있던 사물과 고정된 물질 들이 호흡하고 생동하며 깨어난다. 정물(靜物)이 정물(情物)화되는 그 신비로운 작용은 황은주의 시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마법이다. “몽상하는 대로 존재하는 세계를 향해”(해설, 「몽상가의 정원」) 시의 언어는 끊임없이 변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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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탕헤르라 말하고 탁자를 만진다 그것은 수요일의 일이다 그것은 화요일의 일이었다 너는 경계를 녹여 버린다 그것을 혹은 그곳을, 탕헤르에서 만나자 말하는 순간 탕헤르의 탁자로 네가 왔다 너의 숨결에선 불이 일었고 나의 저녁은 일그러졌다 너는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은 수요일의 일이었다 그것은 화요일의 일이다 모로코에서 만나자 말하는 순간 모로코의 돌로 네가 온다 너의 숨결에선 불이 일고 나의 잠은 재가 된다

―「탕헤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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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눈길이 닿은 대상들은 더 이상 그 이전의 무엇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익숙한 사물들이 저기 멀리에 놓인 낯선 것들이 되어 있다. 황은주의 시에서는 어떠한 제약도 한계도 없다. 자유로운 몽상들이 현실의 경계를 흩어 무한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생의 그물을 늘리며 지구를 벗어”나는 것(해설, 「몽상가의 정원」)이다. 시인은 왜 끊임없이 경계를 허물며 우주로 나아가는 것일까. 고이지 않으려는 생의 의지 때문이 아닐까. 밑도 끝도 없는 시인의 생의 의지는 예고 없이 의외의 이미지를 불러일으켜 “첫 발작”과도 같은 의식의 각성을 일으킨다. 시인의 시선을 관통한 그 어떤 대상이 고여 있는 존재로 썩어 가지 않도록, 생의 밀도로 충만한 정물(情物)이 되도록.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온 세계를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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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접시 사이는 달걀 프라이로 미끌거리고

이번 생은 프라이로 시작하는군요 끓어오르는 레드, 레드, 레드홀을 지나는 중입니다 욕조가 뱀처럼 뒤틀려 있습니다 당신이 다녀간 흔적입니다 조문의 향기입니다 귓불에 장미향을 새긴다는 건 불안해서 붉어지려는 것 더 붉어지려고 뉴욕레드벨벳케익을 삽니다 붉어지려는데 불자동차가 지나가는군요 솟구칩니다 불면과 사과처럼 가볍게 탁자는 뒤집힙니다 발의 발작처럼 왜곡과 술이 있습니다 날아갑니다 최신 망원경을 가졌다면 백 년 전에 발이 뒤엉킨 블랙홀을 기억했을 텐데요 망원경과 망각 사이 징검다리가 있고 징검다리를 밟으며 뜨거운 달걀 프라이를 건너갑니다 자정엔 커튼을 태울 것입니다 정오엔 해바라기를 짓밟을 것입니다 해바라기 안에는 만 개의 방이 있어서 여름은 방의 발작입니다

만 번의 발작인데요

이번 생의 발작은 아직 반짝이지 않았습니다

―「첫 발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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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하는 모든 것들을 향한 뜨거운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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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몽상은 뜬구름을 잡으려는 허망한 꿈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맞닿은 뜨겁고도 치열한 사투이며 “특별한 열정의 불꽃”(해설, 「몽상가의 정원」)이다. 시인은 몽상을 통해 세계를 그려 내고 빚어낸다. 몽상이라는 불꽃은 규격화되고 규정된 고정적 존재들을 뜨거운 불길로 녹여 해체한다. 따라서 시인의 몽상은 ‘규정하는 모든 것들’을 향한 ‘뜨거운 저항’인 셈이다. 기존 관념의 해체는 소멸이 아닌 재생을 의미한다. 강렬한 발작을 통해 일어난 의식의 각성으로 시인은 몽상의 불길을 일으켜 세계를 새로이 빚어내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라는 거대한 화로에 생의 열기가 담긴 “뜨거운 언어”를 집어넣어 세계를 용해하고 전혀 새로운 무엇으로 재생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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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신이 세계를 향해 침투하고 용해되는 충분한 시간을 허용하는 지점. 시적 몽상을 이미지화하는 지점. 내 안에 감춰진 특별한 생의 열정을 찾는 지점. 부동의 시간처럼 보이는 중간 지대에서 존재는 내 안에 감춰진 실존이라는 안락함을 경험한다. 내 안에 숨겨진 작은 불씨가 내밀한 생의 열기로 충만해지는 순간, 나는 세계의 몽상가가 된다. 세계는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자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다. 나는 세계를 향해, 세계는 나를 향해 모든 것을 개방하는 지점에서, 나는 자신과 세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한다.

―「해설, 「몽상가의 정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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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의 시간처럼 보이는 중간 지대”에서 “실존”을 인식한 시인은 비로소 몽상을 시작한다.

“관성이나 타성, 관념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의 과일들이 가득한 몽상가의 정원”을 일구는 것이다. 생의 열기를 담뿍 머금은 시인의 언어들은 몽상가의 정원에서 뜨거운 열매로 무르익어 간다. 언어라는 껍질에 둘러싸인 시의 과육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차 있을까. 이제 그 열매를 베어 물어 확인해 볼 차례다.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ME
중얼거리는 장면
아직도 까뮈
모빌
두부
제4원소
빗소리
우산
아프리카 침대
탕헤르
공중
자오선
너를 강렬하게 버리려는 의지
첫 발작
9개월의 불안
더러워, 즐거워
엄마의 유산
경극
사진관
살아남은 자의 슬픔

YOU
사과를 줄 위에
바닐라바닐라
외국인의 말
정물
날카로운 방
크로키
귀걸이-송곳을 취하여 너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면 너는 영원히
아지트
개기월식
백야
새집
로브그리예, 포도밭은요?
詩길
창 없는 호텔
상냥한 추종자
나비 이야기
녹색
조각칼처럼

HER
금기
좀머 씨에게
상자는 그런 식
눈사람
양면 거울
여름에 대해 말한다
케이크 없는 케이트
칠리를 먹는 밤
불안한 몽타주
발칙한 껍질
평화유지군
꽃보다 오래오래 죽었다
유령놀이
유성우가 출몰하는 길
불온
해변 위에 체스
공원
헝겊인형성애자

해설 | 전영규(문학평론가)
몽상가의 정원

작가

황은주 지음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했다. 2012년 『중앙일보』 제13회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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