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나무를

이병일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20년 6월 29일 | ISBN 9788983928252

사양 124x198 · 120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 분야 시집

책소개

생명력 가득한 언어들이 만들어 낸 에덴의 세계

이병일의 나무는 나무를

 

‘시인수첩 시인선’의 서른여섯 번째 책이자,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인 이병일의 『나무는 나무를』이 출간되었다. 자연과 동물을 주요 시적 대상으로 삼은 이번 시집 또한, 등단 이후 지금까지 ‘서정’의 밀도를 꾸준히 채워 나가는 이병일 시인 특유의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첫 시집 『옆구리의 발견』(2012)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2016)을 거쳐 이번 시집 『나무는 나무를』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시선은 끊임없이 유동하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자연을 향하고 있다.

시인은 삶의 이치를 말없이 견뎌 내는 자연에게서 존재의 고독을 발견하고, 그들의 고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그들보다 더 낮은 곳에 위치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사람과 사물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내는 일이 시라고 믿었”으며, “어머니는 사물을 잘 보려면 몸이 먼저 어두워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고백한다. 자연과 공존하며 거기에 깃든 고독과 생명력을 포착하고 그려 내는 과정에서 시인의 언어는 점점 에덴을 닮아 간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전영규는 시인이 그리는 “자연이 지닌 첨예한 생명의 촉수”가 “어느덧 시인의 에덴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에덴, 태고의 낙원에 가닿고자 하는 속 깊은 열망

 

그렇다면, 시인이 그리는 에덴은 어떤 곳일까? 서정시를 이른바 ‘시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듯이, 시인이 그리는 에덴은 인간이 더럽혀지기 전 순수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곳이다. “모래알이 휘발되도록 빛을 숨겨 두”는 사막(「발」), 모든 것이 “몸을 휘 더듬는 물빛이고 물소리로 돌아”가는 곳(「계단식 논의 수력학」), “우리에게 피를 주고 공중을 높이 치켜든 저 피자두나무”(「피자두」)의 이미지처럼, 이병일 시인이 추구하는 에덴으로서의 시는 아픈 곳을 치유해 주는 신앙의 시다.

 

저 물빛을 쫓아 침묵을 삼키고 지평을 넘는 얼음장수

구름털이 따가운 당나귀의 입이 되고 발이 된다고 했네

오래 쓰고 곱게 쓴 곡괭이로 죽을 만큼 힘을 쓰고

바위를 밀어내고 흙을 파고 빙하를 찾는다네

얼음은 아픈 곳을 낫게 해 주는 신앙

짐승과 사람을 새것으로 반짝, 바꿔 놓는다고 했네

절벽은 외면할 수 없어서

한참씩 기도를 하고

한참씩 이쪽저쪽 잘 통하는 바람으로 낯을 씻는다네

―「침보라소」 부분

 

시인이 그려 내는 생명과 치유의 이미지는 시의 언어를 통해 에덴이 된다. 시인이 발견한 생명의 속성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여정을 거치고, 그 순환의 과정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치유된다. 여기서 생명이란, 위의 시에 “당나귀”가 나오듯 사람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나의 시 쓰기는 사람의 눈이 아니라 동물의 눈과 입과 귀가 되고자 했다”(이병일, 「나는 왜 동물의 언어에 집착하는가?」, 『포에트리 슬램』, 2019)는 고백처럼, 이병일 시인의 에덴에는 여러 동물이 산다.

“죽기 전까지 몸에 우물을 파고, 잔별이란 이끼를 키”우는 향고래(「향고래」), “일곱 가지의 병을 가진 아이를 위해” “이빨과 발톱과 눈동자를 꺼내” 주는 아무르호랑이(「아무르호랑이의 쓸모」), “북두칠성 뜨는 밤, 저 수평선 끝까지 다녀와서 빙산 곁에서 죽는” 일각고래(「일각고래」)는 시인이 추구하는 에덴 그 자체인 동시에 시인 자신이 그리워하고 되고 싶어 하는 어떤 존재다. 시인은 에덴을 그리면서도 자연에 깃든 고독을 잊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이병일의 ‘서정시’가 자연 예찬에만 그치지 않는 이유다. 표제시인 「나무는 나무를」에 이러한 ‘자연의 고독’이 잘 나타나 있다.

 

나무는 나무를 지나 커다란 물항아리로 앉았죠

꽃과 열매를 다 잊고 골짜기에서 짐승과 한철,

겹겹 산 능선을 이루면서 지친 기색도 없다지요

나무는 나무를 지나 죽고,

죽은 후에야 그루터기란 이름을 가진다고 해요

 

온화하게 산과 강을 건너는 저녁을 삼킨 나무

오늘은 신발 벗어 두고 달의 핏자국을 만져요

나무는 천둥새를 쫓아온 사냥꾼인데요

뉘우침도 많아서 왜 여기에 왔는지 금방 잊고요

첫서리에 제 혼이 핏빛으로 지나간다고 잎을 벗죠

―「나무는 나무를」 전문

 

 

붉은빛으로 빛나는 생태의 세계

 

전영규 평론가는 이번 시집을 시인의 앞선 시집들과 비교했을 때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낯선 색채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바로 ‘붉은빛’이라고 말한다. “독니 가진 것들이 매일 바퀴에 깔려 죽었지만/붉은빛은 끝도 없이 목 가진 것들을 비틀어 꺾는다”(「붉은빛의 거처」), “雪花에 기대어 사는 것들은 발자국을 지닌 짐승인데/으깨진 것들은 붉은빛으로 발견되었다”(「동백과 고라니」), “땅 위에 사는 것들은 팥의 껍질과 붉은빛이/오장육부의 피를 틔우고 귀신을 쫓는다고 말하죠”(「팥」) 등에 등장하는 ‘붉은빛’은 생명을 상징한다. 이 ‘생명’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거나 뜨겁게 불타는 이미지이기보다는, 죽은 것들이 새 생명을 얻거나 정화되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지점을 상징한다.

 

폐허, 절로 외져 없었던 것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든다

 

날씨가 흐려도 목청을 높이는 사슴 떼가 청태를 뜯는다

 

여남은 뿔에만 골라 피는 봄빛이 흉터를 지우려 할 때

 

반은 희고 반은 분홍인 것이 그저 신성한 그 짓을 했다

 

다저녁 별자리와 뿔은 묵약도 없이 한 방향으로 자랐다

 

뿔에 난 꽃가지들은 쌀랑쌀랑 낙화도 없이 설경인데

 

당분간 몸이 되려고 하는 것들이 신열을 앓을 것이다

―「당분간」 전문

 

붉은빛은 또한 흙의 빛깔과도 닮았다. 이런 점에서 이병일의 시는 흙에서 태어난 생명이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를 노래하고 있기도 하다. 자연 속에서 생명의 첨예한 촉수를 발견하며 그들과 공존하는 법을 배운 시인의 언어는, 어느덧 흙이 가진 빛을 닮아 간다.

 

낮과 밤이 둘로 갈라지듯

뼈와 살은 흙의 얼룩과 빛으로 돌아간다

한 세상 떠돌면서

아직도 멀리 가지 못했는지,

돌부리만 일렁거린다

태풍이 왔지만 초분은 무너지지 않았다

 

물난리 난 어느 오후의 왕잠자리 나와 놀듯

진흙 두꺼비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땅벌레들 붉은빛을 훔쳐 와서 아궁이를 굽는다

―「파랑새가 된 사람」 부분

 

이병일의 세 번째 시집 『나무는 나무를』은 다시 태어나고자 붉은 신열을 앓는 자연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시 또한 자연의 생명들을 향한 시인의 애정과 더불어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나의 시가 흙이 가진 빛을 닮고자 하는 시인의 순연한 욕망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나를 포함해 흙에서 태어났기에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생명의 섭리를 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시인의 에덴처럼, 실러 또한 “식물과 동물은 인간에게 영원히 가장 소중한 것으로 남아 있는, 인간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흙이 지닌 빛을 닮고자 하는 시인의 언어는 지금도 아름답게 빛난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남아 있을, 우리의 잃어버린 어린 시절이자 언젠가 돌아가야 할 그곳. -전영규(문학평론가)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피자두·13
나무는 나무를·15
가을비·16
진관사에서·17
거머리 소년·18
고사목·20
붉은빛의 거처·21
절망에 바치는 송가·22
나무 소년·24
물병·25
생태에 젖은 뱀들의 피·26
물그릇의 기도·28
동백과 고라니·30
장도리와 못
천렵(川獵)
개기월식·36
여우의 후일담·38
향고래·40
사냥꾼의 후예·42
낮에 생긴 피·43
신보트피플·44
계단식 논의 수력학·46
침보라소·48
팥·50
발·52
족제비 꼬리털의 구언(丘言)·54
외면·56
백운·57
꽃잎, 꽃잎으로·58
불개와 달
조용한 이야기·62
일각고래·64
아무르호랑이의 쓸모·66
바위 많은 설악에서·68
곰나루의 큰 돌·70
흰소의 산책·72
백사숲 도롱뇽·74
은도끼 금도끼·76
당분간·78
굴뚝 숭배자·79
불과 꽃과 잉어의 시·80
소나기 정물·81
파랑새가 된 사람·82
멧돼지와 달의 파수·84
끝없는 여름
들장미·87
한 오라기의 존재감·88
곡우(穀雨)·90
홍어의 시·91
나의 지붕·92
마지막 제의·94
얼음새꽃·96
극야·97
설경

해설 | 전영규(문학평론가)
녹명(鹿鳴)에서 적명(赤命)으로

작가

이병일

1981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문학수첩』 신인상에 시,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옆구리의 발견』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이 있다. ‘대산창작기금’을 수혜하고 〈오늘의젊은예술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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