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김태형

브랜드 문학수첩

발행일 2020년 11월 20일 | ISBN 9788983928405

사양 124x198 · 128쪽 | 가격 8,000원

시리즈 시인수첩 시인선 40 | 분야 시집

책소개

내가 쓰는 시도 그 마술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김태형의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시집을 읽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이는 시인의 약력을 제일 먼저 보기도 하고, 시집을 후르르 넘기다 선뜻 눈에 띄는 시 한 편을 먼저 읽기도 하고, 혹은 목차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제목의 시를 골라 보기도 하며, 뒤표지의 추천사나 작품 해설을 먼저 읽기도 한다. 읽는 사람의 습관에 따라 혹은 시집마다의 묘한 분위기에 따라,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 순서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인수첩 시인선’ 40번째 시집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는 시인의 산문 「나의 서술어」부터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주례사와 같은 작품 해설의 자리에 놓인 이 산문은 김태형 시인의 이번 다섯 번째 시집과 김태형 시인이 어떤 이인가를 가장 쉽게 풀어놓은 공략법 혹은 자술서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초능력 훈련법이나, 프랑스 왕립천문학회에서 이름 붙인 소행성 ‘랭보’에서 시작된 자기 시론, 중학교 1학년 종업식에서의 마술공연, 그리고 자신이 돌이 되는 마술을 꿈꾸고 있다는 고백 등은 김태형 시인이 시인으로서의 삶과 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단면적으로 보여 준다.

 

 

치열한 낯섦의 세계에서 존재의 비의를 밝히는 마술의 세계로 귀환

 

1992년, 스물두 살 시인 김태형의 등장은 당시 시단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다양한 문화·사회·정치적 코드를 난삽하고 난해한 ‘낯섦’으로 만들어 내면서 20대 시인이 대치하고 있는 세상을 치열하게 보였다. 자신만의 감각화된 언어로 파편화된 삶의 기표들을 섬세하게 응집시키는 시적 마력도 보여 주었다. 이때 눈 밝은 독자들은 이미 그의 시편에서, 어떤 세파에도 흔들림 없이 시인으로서의 운명을 살아갈 그의 의지 또한 읽어 냈다.

그리고 어느새 지천명에 접어든 시인은 등단 초기 파격적인 열정과 혹독한 고독이 혼재하는 강렬한 내면의 풍경을 보여 주는 대신, 성찰의 태도로 삶과 사물, 현상에 깃든 비의를 밝히는 마술사가 되었다. 20대의 결핍과 불안을 치열한 사고의 흔적으로 여과 없이 보여 주었던 젊은 시인이, 섬세한 감각과 개성적 시선으로 존재와 세계의 본질을 탐색하는 사유의 세계를 일상의 구체적 풍경으로 펼쳐 놓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젊지만 이젠 시단의 중진(?)쯤에 위치하게 된 그 시선은, 그의 시력(詩歷)만큼 나직하고 깊고 평안하다.

 

 

바람이었다 지평선이었다 어둠이었던, 돌에 응축된 시인의 욕망

 

지금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뿐

젖은 돌은 젖은 돌이 되려 하고

줄기러기는 줄기러기로 떠나갔다

오늘밤에는 뭘 할 수 있을까

 

옷소매가 길어 손등을 덮었다

자주 팔뚝을 쓸어 올려 설산 너머 팔이 길어져도

긴 옷소매가 흘러내려 이내 손등을 가렸다

두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만 나를 에운다

 

혼자였다면 죽은 사람이었을 거라고

누가 모닥불을 피운다

내가 아는 말로 나는 가까스로 말할 수 있을 뿐

다 지우고 나자 내 손에 돌 하나 쥐여 있었다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부분

 

시인의 산문인 「나의 서술어」에서 김태형 시인은 “요즘 내가 꿈꾸는 마술이 있다. 바로 돌이 되는 것이다”라고 고백한다. ‘돌’은 산문에서뿐만이 아니라 이번 시집의 작품 속에서 숱하게 나타난다. 시인은 이 돌을 황무지를 걷다가 줍고, 사막에서도 줍고, “물때 젖은 조약돌 하나”를 건네받기도 한다. 또 “수천 개의 돌 속에 두 손을” 묻기도 하고, “발자국을 감추기 위해 정원에 돌을” 깔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돌멩이 같은 숨”을 쉬기도 한다. 도대체 시인에게 돌은 어떤 상징과 의미일까?

김태형 시인에게 돌은 하나의 기원이다. “바람이었다가 모래였다가 볕이었다가 화산재였다가 들판이었다가 지평선이었다가 어둠이었을” 돌을 시인은 간절히 원한다. 그것은 태초의 시원과 닿아 있고 탄생과 이어져 있으며 별과 사막과 연결되어 있어 시인은 단 하나의 돌을 통해 모든 것을 보고 만지고 느끼기를 소망한다.

돌은 원시시대 이후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인간 문명 발달의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탄생, 풍요와 수호 등의 신비로운 권능의 존재로 여겨져 왔다. 시인은 우주의 신비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 돌에 압축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돌이 되고 싶어 하기까지 한다. 본질에 이르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이 투영된 매개라고 할 수도 있다. 삶은 실체가 없고 그러므로 애초부터 잡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존재, 행위, 감정, 관계 등 하나같이 잡을 수 없는 것들이며 이것들을 잡으려 손을 대면 오히려 부서져 버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김태형 시인은 이렇게 흩어져 버리는 존재와 대상에 대한 감각, 우연이거나 일시적으로 현상화된 현실을 하나의 돌로 집약하고 상징하여 감각화하고 있다. 존재와 대상에 대해 감각하고 이를 전유하려는 시적 노력은 현실의 비현실성까지 아우르게 되며 그의 시의 강한 추동력으로 작동한다.

 

 

새로운 이해와 질서로서의 기다림의 자세

 

훌쩍 자라 버린 시인은 젊은 시절처럼 세상에 덤비지 않는다. 대신 기다리며 자세를 가다듬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들판은 눈이 있고 숲에 귀가 있다는 말은 이상하게도 내게 가만히 고이더라

 

들판에선 눈이 되고 숲에선 귀가 되지 그게 나였으니까 그 말엔 내가 있으니까 곁이 있으니까

 

들판이 아니라 숲이 아니라 내가 있으니까

 

바라다보는 끝닿은 곳에 지평선이 한 줄 그어져 있으니 아무리 세상이 둥글어도 내게는 단 한 줄만 그어져있으니 그곳으로 건너가는 눈빛은 참 멀어져야 했으니

 

나무 뒤에 나무들이 있어 그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고 가만히 양치류처럼 귀가 자라난다

 

바람에 실려 오는 것은 들을 수 없는 소식들 그럴수록 귀는 나무 뒤로 멀어지고 귀가 멀어서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뿐

 

내가 되고 곁이 되고 이 세상이 되어서 오래된 말은 내일도 오래된 말이 되고 또 오래된 말이 되고

―「이루어진 말」 전문

 

이제는 비가 내리지 않고 저녁별이 뜨지 않는다 이름을 잃어버린 빈 정원은 덩굴에 덮여 가고 있다 아무리 기어오르고 뻗어 나가려 해도 햇빛이 되고 바람이 되고 안개가 될 수는 없지만 정원은 정원으로 돌아가도 나는 죽은 듯이 기다리지 말라고 살아 있으려고 죽은 듯이 기다리겠다고 정원이 되어 있다

―「잃어버린 정원」 전문

 

가만히 있으면 스스로 고이는 것들이 결국 시인이 되고 시의 곁이 된다. 그래서 시인은 오로지 가만 기다릴 뿐이다. 기다림은 수동의 자세가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행위의 완성된 자세일 것이다. “살아 있으려고 죽은 듯이 기다리겠다”는 역설적 표현에는 시인의 이런 간절함이 묻어난다. 그는 시를 만들지 않는다. 시로써 세상을 붙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오래전에 접은 것 같다. 다만 그는 만들지 않고 옮겨 내려고 노력한다. 옮기는 것은 만드는 것과 달리 시적 대상을 놓치지 않으려는 간절함이며 대상의 생존 방식을 최대한 존중하는 형식이다. 그래서 기다리겠다는 시인의 고백은 대상의 현현에 대한 문제에 닿게 된다. 김태형의 시는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 세상과의 소통을 겨냥하고 있다. 세상과의 관계를 회피하고, 소통으로부터 도피하며, 관계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그의 시는 전 방향적인, 우주적 접촉을 시도한다. 타자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통해 오히려 직접적이고 내밀한 소통을 시도한다. 그는 세상 모든 존재와 대상을 자신의 시에 가둘 수 있다는 오만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과 이해와 질서로 기다림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일반적으로 시는 사물과 대상과 존재를 발견하고 그것들의 존재 방식과 각각의 관계를 포착해내는 것이지만, 김태형 시인은 대상과 존재의 경계, 대상과 존재의 침묵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를 일구고 그 세계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기를 원한다. 이러한 시적 발견이 그에게는 존재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미지를 깨닫는 그의 마술

 

시는 시인이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쓰는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모르되 시는 알고 있는 그것. 그래서 시인은 앎으로부터 철저하게 멀어져야 하며, 매번 기성의 인식과 사고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이런 미지의 여행을 시인은 관조와 숙고로 이끌어 낸다. 시적 대상에 대한 단편적 확인이 아니라 미지의 영역에서 자신 역시 하나의 미지였음을 마침내 깨닫는 일이 그의 시 쓰기일 것이다.

어려서 마술을 꿈꾸던 소년은 이제 마술의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는 없지만, 현실을 다르게 보여 줄 수” 있는, “급기야 나를 찾고 지우고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마술로 우리 곁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삶에 대해 알지 못한다

시월 찬바람에 내 몸은 닫혀 있다

삶에 대해 가르치려는 자들을 오래도록 경멸해 왔다

 

잎사귀와 저 아래 쓰디쓴 온몸으로 내려간 뿌리들이

나를 열고 나오기를 기다려 본다

어원을 찾을 필요가 없는 말들을 나는 쓰고 싶다

―「첫 문장을 받다」 부분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마디
이루어진 말
명사와 서술어 사이에 놓인 돌 하나
파두
잃어버린 정원
구름과 마찬가지로
장미와 고양이
초라한 짐승
왜행성
유라크 나무 사이에서 유라크 나무가 자란다
양의 계절
투루툭 마을의 나귀는 이렇게 운다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현해탄은 어디인가
잃어버린 끈
위험한 짐승
실어
하루가 더 있다

2부
나비는 어떻게 날아가는가
절벽 사원에 부리가 노란 까마귀가 산다
바람놀이
밤고양이
틀뢴
돌아도는 저녁
장면이 있는 어떤 얼굴
외부
Samantha Fish―I put a spell on you
세 번째 발가락
저녁의 경우
흔한 구름
가려진 달
나의 고양이
문래동2가

3부
달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있다
고원을 내려가며
알타이
잘린 손가락
허구가 되는 방식
다른 말
공유정원
내벽
거짓말 속에 늑대가 살아 있다

느린 심장
잠든 신과 숭배자와 구름 속으로 떨어지는 뱀의 시간
바구니
첫 문장을 받다
이르러서
사원에 들어갈 때는 머리 위의 종을 쳐라
창라

산문 | 김태형
나의 서술어

작가

김태형

1971년 서울 출생. 1992년 『현대시세계』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로큰롤 헤븐』 『히

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 『고백이라는 장르』, 시선집 『염소와 나와 구름의

문장』, 산문집 『이름이 없는 너를 부를 수 없는 나는』 『아름다움에 병든 자』 『하루 맑음』 『초능력 소년』 등이

있다. 제4회 〈시와사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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