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코어 SF의 거장이 그린 지구 종말 시리즈 그 첫 번째
다시 나타난 세상은 그들에게 절망일까, 구원일까?
《물에 잠긴 세계》는 세계 종말 이후 2145년의 런던,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도시가 배경이다. 이상 고온과 대홍수로 빙하가 녹아내린 극지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가 물에 잠겼다. 또 생물들의 역진화로 급기야 지구에는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의 생명체들이 출몰하기에 이른다. 생물학자인 로버트 케런스 박사는 지구의 종말로 뜨거워진 석호의 식물과 동물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조사단의 일원이다. 그는 주민을 보호하고 해안선 변화를 기록하기 위해 열대 석호로 변해버린 런던 지역에 기지를 구축한 릭스 대령의 보호 아래 있다. 기온 상승과 복사열 증가로 그들 중 일부는 인류 안에 내재된 생물학적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기시감(旣視感)을 느끼기 시작한다. 고생대 자연의 일부가 된 사람들은 현실감각을 상실하고 무의식 속으로 침잠해가면서 수백만 년 전에 잊힌 고생대로의 회귀와 제2의 아담을 꿈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하이 수용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J. G. 밸러드는 히말라야 산맥의 눈이 녹아 홍수로 물에 잠긴 상하이에서의 경험에 영향을 받아 이 소설을 썼다. 그는 열대 석호에 잠긴 북유럽의 아름다운 건물들과 양치식물과 거대 도마뱀이 점령한 지구의 모습을 적나라하고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다. 초현실주의 화가 폴 델보와 막스 에른스트 그림에서 보이는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생명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낸 이 소설은, 지구환경 변화로 인한 인류 대재앙을 이야기하면서 ‘물’을 매개로 수백만 년의 간극을 넘나드는 하드코어 SF의 명작을 완성해냈다. 시대의 종말에 괴로워하기보다, 새롭게 다가올 혼란스러운 현실에 황홀해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J. G. 밸러드 <지구 종말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소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